삶은 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항해에 곧잘 비유된다. 끝을 알 수 도 없고, 언제 집채 같은 파도가 덮칠지 가늠할 수도 없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어디를 향해 가느냐 하는 방향설정이 참으로 중요하다.
▲ 사교루 앞에 나란히 선 민황기·김정열씨 부부. |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에 자리한 사교루에서 그곳을 지키는 민황기(청운대 교양학부 교수)ㆍ김정열씨 부부를 지난달 27일 만나봤다.
사교루는 1668년 현종 9년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가문의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강학공간이다.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재실 '영호암'이 먼저 세워져 있었고 그 곁에 사교루를 지었다. 조상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 안에서 후손을 교육하고자 했던 깊은 뜻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솟을대문 밖으로는 삼대에 걸쳐 일곱 명의 효자를 배출, '삼세칠효'를 이룬 효자정려각이 세워져 있어 여러모로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교루'라는 이름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었으며 현판은 우암의 제자인 권상하가 썼다.
사교루의 의미에 대해 민 교수는 “사교(四敎)는 공자의 논어 중 술이 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四敎를 근본으로 삼은 데서 나온 말이며 문행충신(文 行 忠 信)이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민 교수는 “문(文)은 학문, 행(行)은 도덕적 실천, 신(信)은 믿음이며, 충(忠)은 흔히들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고 하는데 진정한 뜻은 자기 마음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기에 충이란 자기를 통해 타인과 사회와 나아가서 국가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자 확대된 자아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네 가지 가르침을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든 공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 교수 부부가 단순히 관리만 하고 있던 관리인을 내보내고 사교루에 들어온 것은 지난 2002년의 일이다. 1년에 몇 번 문중 행사 때만 문을 열던 폐쇄적인 공간을 지역민과 함께 나누고자 많은 노력을 해 왔다. 10여년 전부터 한국사교학술원을 세워 청소년 문화학교를 운영하며 경전읽기와 역사탐방,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인근에 있는 대덕초등학교와 대덕중학교에서 '어머니 독서 동아리'를 주관하여 학부모 독서캠프를 열기도 했고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기도 했다.
5년 전부터는 시제가 열리는 날에 학생들을 불러 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게도 하고 떡과 과일을 나눠 먹게도 했다는 민 교수 부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내 염두에 두는 것이 문중의 가르침인 사교, 즉 문행충신”이라고 강조했다. “고전읽기를 통해 공교육에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인성교육을 보충하고, 자연과 벗 삼으며 심신을 단련했던 풍류정신이나 선비정신을 느끼게 하면서 전통정신과 문화를 심어주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아내 김 씨는 “지식만 집어넣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일 힘든 것은 요즘 엄마들이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자식 밖에 모르는 배타주의라는 점이 많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60%는 듣고 40%만 말하기를 강조한다는 김 씨는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자연히 배려심이 생기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민교수는 “여흥 민씨 가문에는 개인의 입신양명 보다 효행을 하느라 가난하게 산 사람은 많아도 부를 축적하면서 산 사람은 많지 않다”면서 “그래도 조선 후기 기득권 세력이라 많은 걸 누리며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제는 사회에 뭔가 베풀고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가을 사교루 앞마당에서 유성구청 평생학습원과 함께 정호승 시인을 초청해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행사를 열기도 했다는 민 교수 부부는 “올 가을에도 좋은 자리를 마련해 볼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사교루 앞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하는 민 교수 부부를 보며 문득, '선조로부터 받은 고귀한 가르침들을 세상의 등대로 세워 불 밝히려는 이 부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지'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한소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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