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모(82) 6ㆍ25 참전유공자회 대전시지부장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국가를 위해 몸바친 참전유공자에 대해 국가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 지부장을 만나 한국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과 국가에 바라는 점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 양관모 6ㆍ25참전유공자회 대전시지부장 |
요새 아이들 '한국전쟁이 뭔가요…' 되묻기도
아픈역사 사실 근거한 안보교육 필요
참전유공자 명예수당 15만원 정도뿐 '속상해'
국가가 앞장서 제대로 된 대우 힘써야
-오는 7월 27일이면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이 된다. 기분이 어떤가.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는지 소회가 허탈하다.
통일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다. 당시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현재까지 남북 분단이라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전쟁이 반발한 지도 63년, 휴전상태로 6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들이 자꾸 줄어든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이라는 상처에 둔감해지는 것 같다.
전쟁은 종료된 상황이 아니다. 휴전상태라는 사실을 국민도 알아야 한다. 물론 전쟁은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안보교육이 중요하다.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들에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교육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노병들의 얘기로만 듣지 말고 전쟁에 대한 바로 알리기 교육 등에 노력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장 가슴 아팠던 점은 무언인지.
▲전쟁터에서 전우들을 잃은 슬픔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쟁 당시 전우들이 부상을 당하는 걸 보고도 치료를 못 해줘서 살리지 못한 경우도 많다. 살 수 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총을 들고 치열하게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박갑서(참전 당시 18세)학도병은 전쟁 당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전우 가운데 하나다.
그는 당시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전쟁 당시는 몰랐는데 같이 전투를 하다 보니까 나중에 총탄에 맞아 숨진 걸 확인했다. 그 당시 총탄이 빗발치는 산야에서 통곡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우를 잃은 슬픔에 총성이 퍼지는 전쟁터에서 정말 악착같이 싸웠던 것 같다.
전쟁에서는 이같이 사람들이 죽는 모습이 너무 흔했다. 아군들의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평생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다. 지금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너무 괴로운 감정을 갖고 살아갔다.
당시를 회상하니 먼저 간 전우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 전쟁터에서 발견된 철모 <중도일보 DB> |
▲고향은 황해도 신천군이다. 1938년 할아버지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와 학창시절을 보냈다. 신흥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대전중학교에 입학해 야구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전중학교(현재 대전고등학교) 4학년 때 전쟁을 맞았다. 지금은 고등학교 시절일 것이다. 당시 18살 때 학도병으로 전쟁에 자원 참여했다. 당시 김석원 수도사단장이 '풍전등화 같은 조국을 구하자, 학도여 일어나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진 입대했다. 당시 같이 자원입대한 학도병들이 스무 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도병 자원입대라는 자부심이 컸다. 조국을 구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대구에서 제식훈련을 받고 낙동강 전선 마지막 전투인 영천전투에 참여했다. 북한군과 고지를 뺏고 뺏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시체를 밟고 산에 기어올라가기도 했다.
1952년도에는 공군조종사 하사관에 지원해 합격했다. 하지만, 당시 건강에 문제가 생겨 조종사는 되지 못하고 조종사 후방업무를 지원하다가 전역했다. 육군, 공군 두 부대를 경험한 참전용사다.
-당시 참전했던 영천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달라.
▲영천은 대구 동쪽 34㎞ 지점에 있는 곳이다. 영천이 돌파되면 대구 등 돌파구가 형성돼 한ㆍ미연합군의 낙동강 방어선이 위협을 받게 되는 곳이다.
북한군은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경북 영천지역을 집중 공격했다. 한국군은 영천지역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밀리게 됐다.
다시 미군 전차의 지원하에 10일부터 13일까지 대반격을 전개해 영천지역을 탈환하기도 했다.
영천탈환을 계기로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의 동반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 이 시점부터 한국전쟁의 전세가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천지구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위협에서 벗어나 한미연합군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치열했던 전적지의 흔적이 있어 한국전쟁 전사자의 유해발굴사업이 매년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한국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참전유공자들은 대부분 80이 넘는 고령들이다. 평균연령도 81세다. 유공자들은 여생의 목표가 한국전쟁을 바로 알리고 가자는 것이다. 그게 목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전쟁에 대한 교육이 희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청소년들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물어보면 “일본과 미국과 싸운 전쟁, 심지어 조선시대 전쟁인가요”라며 되묻는 아이들도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국방부 등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한다. 안보교육과 함께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또한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참전유공자들도 학생들 교육을 위해 직접 나서고 있다.
매년 참전유공자들이 전국의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직접 한국전쟁을 바로 알리기 교육을 하고 있다. 대전에서도 활동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대전시교육청과 협조로 하반기에는 더 많은 학교를 선택해 유공자들이 학교에 찾아가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로서 아쉬운 점, 국가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참전유공자회도 국자유공자의 대열보다는 소외된 단체처럼 도외시됐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주인공들인 6ㆍ25 참전용사들의 공법단체로 등록하기까지 55년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전상의 고통과 고령으로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병들이 많다. 참전용사들은 전쟁의 상처로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한국전쟁도 과거의 먼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쟁인 것처럼 잊혀져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다. 국가의 참전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생각할 때마다 속이 상하다. 국민이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참전명예수당으로 15만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다. 국가유공자에 맞는 예우를 해주기를 바란다. 단순하게 경제적 지원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몸바친 영웅들을 후손들이 잘 알 수 있도록 교육의 장도 마련해야 한다.
조성수 기자 joseongsu@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