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의 상처, 기록이 필요하다.
2.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논산포로수용소
3. 잊혀가는 대전형무소 우물터
4. 치열했던 격전지, 세종시 개미고개
5. 60년만에 한국 찾은 참전 미군 어빙 포츠맨티어
6. 취재를 마치며
▲ 참전미군인 어빙 포츠맨티어씨가 한국전쟁 당시 촬영한 대전형무소 우물 사진. |
연합군에 쫓기던 북한군이 1557명의 우익 인사를 학살했고, 이 중 261명이 총살된 후 우물에 수장됐다. 한국자유총연맹 측은 매년 유가족 등과 위령제도 지내고 있다.
하지만, 너무 홀대받고 있다.
우물 지붕은 거의 무너졌고, 무너진 지붕 위에는 잡풀이 자라나고 있다. 대전형무소에 남아있는 망루는 대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지만, 정작 우물터는 관심 밖이다.
대전문화연대, 대전여민회, 중촌마을 역사탐험대그루터기가 문화재자료 지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전시는 듣기만 하고 있다.
▲ 대전시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한국전쟁의 산 역사인 대전형무소 우물터의 무너진 지붕에 잡풀이 자라고 있다. 손인중 기자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대전지역 적대세력 사건'으로 당시 1557여명이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됐다.
이들은 대전형무소, 프란치스코 수도원(당시 충남 정치보위부) 등에 수감됐다가 대전내무서(대전 경찰서)와 충남 정치보위부에 심문을 받은 후 1950년 9월 25~27일에 걸쳐 희생됐다.
희생자 1557여 명 가운데 261명이 총살된 후 3개의 우물에 수장됐다. 이들은 대한청년단 국민회 등 우익단체 간부와 지주, 경찰, 공무원, 한국군과 미군, 종교인 등 대부분 20~40대 남자들이다.
1950년 9월 중순 전세가 북한에 불리해지자, '유엔군 상륙 시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는 북한노동당 지시에 따라 북한군이 이들을 집단 총살한 사건이다.
당시 희생자들은 현재 목동, 용두산 일대에 임시매장됐다가 1952년 충남도청이 시신을 수습해 지사총을 거쳐, 현재 대전 중구 사정동 사정공원 내 애국지사총에 옮겨졌다.
▲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 47호로 지정된 대전형무소 망루. 손인중 기자 |
당시 형무소에는 크고 작은 4개의 우물이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우물은 취사장 부근의 큰 우물로 추정된다. 망루를 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약 130m 떨어져 있는 우물은 문화재자료 지정에서 제외됐다.
우물이 갖는 역사성과 상징성으로 볼 때 우물도 망루와 함께 문화재자료로 지정해야 한다는 것이 시민단체와 유족회 측의 주장이다.
망루 제작 시기에 대한 고증도 필요하다. 전쟁 시 사진자료 등에 따르면 당시 망루는 각이 진 형태였다. 현재 남아있는 망루는 둥그런 원형형태다. 망루는 전쟁이 끝난 후 신축 또는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문화연대 안여종(45) 운영위원은 “대전형무소 우물터는 실체가 남아있는 너무나 소중한 한국전쟁에 대한 산 역사”라며 “지자체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방치되고 있다. 망루의 제작시기도 전문가를 통해 고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성수 기자 joseong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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