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호]이응노, 동서문화의 융합과 소통의 선구자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이지호]이응노, 동서문화의 융합과 소통의 선구자

[논단]이지호 고암 미술재단 대표

  • 승인 2013-06-06 13:20
  • 신문게재 2013-06-07 20면
  • 이지호 고암 미술재단 대표이지호 고암 미술재단 대표
▲ 이지호 고암 미술재단 대표
▲ 이지호 고암 미술재단 대표
이응노미술관은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미술관이다.

2007년 개관 당시 백색 시멘트와 뮤제오그라피(museographie)를 처음 사용하며 명품미술관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건축도 예술품이어야 한다는 세계 추세에 부응해 건축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이 같은 호평 덕에 일 년 내내 건축과 학생들의 시설 견학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이응노 미술관이 주목받는 이유가 단지, 건축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것과 건물 내ㆍ외부 콘셉트를 건축가의 디자인으로 통일시킨 '뮤제오그라피'만은 아니다.

동양사상인 '비움의 미학'을 담아내려는 건축가 로랑 보두엥(Laurent Beaudouin)의 의도가 건물 곳곳에서 배어나기 때문이다. 보두엥은 기존 예술의 전당과 시립미술관 등 다른 건물과 조화를 위해 미술관의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 소박하고 수수한 미술관을 만들려고 했다.

마치, 고암의 수묵 담채화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담담한 매력을 풍기는 건물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지 생각될 정도다.

실제 보두엥은 고암의 주요 소재인 대나무와 소나무를 건물의 정문 앞과 창문 너머에 자리 잡도록 했다. 그는 미술관에 장식적인 기교의 미보다 보이지 않는 '氣'의 의미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그가 동양화의 기본정신인 '기운 생동'을 이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고암이 원했던 미술관은 산속의 암자와 같은 작고 소박한 집, 하지만 안채로 들어가면 내공이 느껴지는 꽉 찬 공간이었을 것이다. 보두엥은 고암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고암이 남긴 문화적 유산에서 고암의 뜻을 이해한 뒤 현재와 연결하는 매개적 역할을 수행했다.

보두엥이 고암의 작품을 모티브로 미술관을 설계하였던 것처럼, 고암은 이탈리아 탐험가이자 여행가였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고암이 남긴 '동방견문록' 79점의 작품은 지난 1980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관련한 책을 집필하던 한 작가가 고암에게 삽화를 의뢰하며 제작이 되었다.

그런데 고암은 제작 당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귀동냥한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상상력을 더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마르크 폴로의 동방견문록' 역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의 여행과 중국에서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감옥에서 만난 루스티첼로라는 소설가에게 받아쓰게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암과 마르코 폴로는 자유를 향한 호기심과 현실 이탈을 꿈꾸는 상상가로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가 지나면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어디부터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다.

고암의 동방견문록도 그 돌연변이의 하나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고암의 이 작품은 이탈리아 작가의 서술을 기초로 하지만 표현기법 면에서는 동양화의 풍경묘사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마르코 폴로 시리즈에 주로 사용된 고암의 표현기법은 이동시점을 활용한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사물을 고정된 시점으로 바라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대상의 면면을 관찰하고, 기억에 따르며 재현한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는 원근법과 명암에 충실한 서양화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는 외적 형상보다 내면의 깊이를 중요시하며 정신이 깃들어 있는 부분에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극히 섬세한 묘사가 있는가 하면 생략과 여백으로 대담하게 처리했다.

마르코 폴로가 동양을 여행하고 유럽인들의 시선에서 동방견문록을 남겼듯이, 고암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프랑스에서 서예 추상과 군상이라는 한국적 표현양식으로 된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고암의 예술에 눈을 뜬 프랑스인 로랑 보두엥은 대전에서 이응노 미술관이라는 동서의 만남을 상징하는 미술관을 세웠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접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고암 이응노 화백의 뛰어나 상상력의 결실인 동방견문록은 모든 분야의 융합과 소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꼭 감상해야 할 작품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신탄진동 고깃집에서 화재… 인명피해 없어(영상포함)
  2. 대전 재개발조합서 뇌물혐의 조합장과 시공사 임원 구속
  3. [현장취재]대전MBC 2024 한빛대상 시상식 현장을 찾아서
  4. aT, '가루쌀 가공식품' 할인대전 진행
  5.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1. 국립농업박물관, 개관 678일 만에 100만 관람객 돌파
  2. 농림부, 2025년 연구개발 사업 어떤 내용 담겼나
  3. 제27회 농림축산식품 과학기술대상, 10월 28일 열린다
  4. 해외농업·산림자원 반입 활성화 법 본격 시행
  5. 사회복지법인 신영복지재단 대덕구노인종합복지관, 저소득어르신에게 쌀 배분

헤드라인 뉴스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충청권 소방 거점 역할을 하게 될 '119복합타운'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다. 충남소방본부는 24일 김태흠 지사와 김돈곤 청양군수, 주민 등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19복합타운 준공식을 개최했다. 119복합타운은 도 소방본부 산하 소방 기관 이전 및 시설 보강 필요성과 집중화를 통한 시너지를 위해 도비 582억 원 등 총 810억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위치는 청양군 비봉면 록평리 일원이며, 부지 면적은 38만 8789㎡이다. 건축물은 화재·구조·구급 훈련센터, 생활관 등 10개, 시설물은 3개로, 연면적은 1만 7042㎡이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