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의 상처, 기록이 필요하다.
2.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논산포로수용소
3. 잊혀가는 대전형무소 우물터
4. 치열했던 격전지, 세종시 개미고개
5. 60년만에 한국 찾은 참전 미군 어빙 포츠맨티어
6. 취재를 마치며
▲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 모습 |
논산시와 논산문화원, 육군 등에 문의했지만, 구체적 내용을 얻지는 못했다. 취재과정에서도 군 당국에 협조요청을 했지만 60여년이 넘는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빙 포츠맨티어씨와 논산을 직접 찾아갔다. 지역의 6·25 참전유공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 모여있는 아이들. |
기억하는 지역주민도 많지 않았다. 논산 포로수용소는 1952년부터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전까지 운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6000여명 안팎의 반공포로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1953년 6월 18일, 논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석방사건이 벌어졌다. 논산 등 국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가 일제히 수용소를 탈출한 것이다.
▲ 논산육군훈련소에서 근무했던 이상재(83·논산·참전 당시 하사근무)씨가 1953년 6월 18일 논산 포로수용소 반공포로 석방시 명령을 받고 출동해 엄포사격을 증언하고 있다. |
하지만,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당황한 미국병사들이 총을 쏴 사상자가 발생했다.
참전 미군인 어빙 포츠맨티어씨는 논산 포로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최소 60~70구의 포로가 총탄에 맞아 숨졌던 것으로 기억했다. 어빙은 시신들을 수용소 내 건물에 옮겨놨고 이후는 기억하지 못했다. 한국은 반공포로 송환문제를 놓고 미군과 갈등을 빚었다. 반공포로들은 국내체류를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반공포로 석방사건이 일어났다.
이씨는 “당시 총을 들고 긴박하게 출동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직접 사격을 하지 않고 엄포 사격만 했다”고 회상했다.
▲반공포로 유해, 넋이라도 위로해줘야=논산 포로수용소 터 어딘가에는 당시 숨진 포로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게 참전유공자들의 증언이다. 116육군병원에서 근무했던 윤인기(74·논산시·참전 시 하사관 근무)씨가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윤씨는 “1981년도로 기억한다. 건물을 짓기 위해 작업 중 백여구에 가까운 유해가 두 곳에서 발견됐다. 포로들 사체로 추정했다”며 “작업을 멈추고 유해를 발굴해 수용소 터 다른 곳에 유해를 매장해 막걸리를 놓고 제사를 지내줬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수용연대가 이동하며 90년대 군인 및 민간아파트가 들어섰다. 지형이 변했지만, 어렴풋이 유해를 매장했던 장소가 기억난다”며 “같은 민족으로 넋이라도 위로해주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발굴작업에 나서면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증언했다.
홍의식(84ㆍ논산시, 참전 시 병장 근무)씨도 “포로들 간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시신을 수용소 터 어디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반공포로가 탈출할 때 주민들이 아궁이에 숨겨주기도 했었다. 이후 논산에 자리 잡거나 한국군에 입대한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반공포로들의 유해를 찾아 넋이라도 위로해줘야 하지 않을까. 참전유공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크다.
논산에서는 상징성이 큰 곳이지만 표지석 하나, 아무런 흔적 하나 찾기 어렵다. 현재는 일부가 공터로 남아있지만, 개발이 진행되면 자취조차 사라질 우려가 크다.
논산포로수용소가 존재했고 수많은 포로가 희생됐고 한국군이 한민족인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반공포로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아버지, 소중한 자식, 배우자 등 가족이다.
군사편찬연구소 포로전문가 조성훈(51) 박사는 “반공포로들은 가족이 북한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유해가 방치돼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라며 “논산 포로수용소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논산시, 충남도에서 관심을 갖고 표지석도 설치하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밝혔다.
조성수 기자 joseong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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