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발부터 '부서간, 관계 기관간 칸막이를 없애고, 이주 공무원의 불만을 행복도시 발전으로 승화시키자'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
지난해 첫마을 입주 완료 및 정부세종청사 개청과 함께 본궤도에 오른 행복도시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새로운 역사를 쓸 태세다. 이충재 청장이 재임기간 공직사회 입지전적인 인물을 넘어, 행복도시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지 주목되고 있다. 본보는 이충재 행복도시건설청장을 만나 그의 삶과 철학, 행복도시 미래 등에 대해 진솔한 얘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7급 공무원에서 차관까지… 주위에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제 스스로가 남보다 뛰어나거나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진인사대천명'을 신조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업무도 승진이나 이해를 떠나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않고 일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에서는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직급이 낮건, 높건 간에 맡은 바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충실히 했을 때 조직이 원만히 운영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청장이 됐다고 해서 편한 것보다는 오히려 행복청 목표인 '행복도시 세종시'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품도시로 만드는 데 더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33년간 공무원으로 생활하는 동안 얻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쏟아 최고의 도시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의미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지금 제가 있기까지는 제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동료,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함께하는 행복청 직원들을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직 입문 초기에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1979년 11월로 옛 건설부 산하 대전지방국토관리청에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대전까지 가야 하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렵사리 대전에 왔더니 이제는 논산 국도유지사무소로 가라고 했고, 그럴 경우 못 가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시험이야 한 번 더 보면 된다는 무모한(?) 자신감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도 인사담당자가 논산사무소에 가보라는 권유로 폭설에 가까운 눈내리는 1월, 버스를 타고 논산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정문에 들어서는데 경비원이 “어딜 함부로 들어가느냐”고 호통을 쳐서 “사실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말을 하자, 갑자기 태도가 180도 변하면서 사무실로 친절히 안내해줬습니다.
그렇게 첫 공직생활은 논산사무소에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을 거쳐 국토교통부(옛 건설부)에서 줄곧 근무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경비원이 제가 공무원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고 공무원의 첫발을 내딛게 해준 장본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행복청이 있는 이 지역은 그 시절 논산사무소 업무 관할구역으로 자주 방문했던 지역인데, 현재 행복청으로 발령받아 행복도시를 만들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현재를 있게한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통현리에서 태어난 저는 임진강댐 인근 군남초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 연천군 청산면으로 이사했고, 초성초교를 나와 동두천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밴드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불었으나, 어린 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많은 폐활량을 필요로해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당시 트럼펫을 입에 대고 장난하다 벽에 부딪혀 앞니가 살짝 나간 것을 볼 때마다 그 때의 추억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이후 고등학교는 서울 돈암동 소재 용문고등학교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진하게 됐습니다.
-맹모삼천지교에 어울리는 부모님의 헌신도 있었다 들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자식들의 교육문제를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잘 꾸려가던 포도 과수원을 한순간에 파시고, 좀 더 낳은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경기도 의정부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지금도 제가 살던 시골에 가보면 커다란 변화가 없는 상황을 생각하면, 당시 의정부로의 이사는 아버지의 탁월한 선택이자 지금의 제가 있게 한 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을텐데요.
▲아버지와 진학문제로 이견을 보이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국수공장 등을 전전하며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우면 천장에 고드름이 맺히는 숙소생활도 해봤고, 월급을 못 받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 공장에서 동료들과 장난삼아 돌아가는 롤러를 손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지 내기를 하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이후 비로소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꿰맨 자국을 보면 쓴 웃음이 절로 납니다.
-사모님과는 어떻게 결혼을 하시게 됐죠.
▲아내의 고향이 공교롭게도 제가 일하는 세종시(옛 연기군 봉기리)입니다. 공직생활 초기 대전국토청에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 주변에서 맞선을 보라고 해서 나가보면 잘 안됐는데, 역시 인연은 따로 있었나 봅니다.
'아홉수는 안 된다'는 주위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28세에 결혼에 골인했고, 당시 아내 나이는 23세였습니다.
혼자 서울로 발령을 받고도 아내의 큰 언니 댁이 서울인 관계로 종종 만날 수 있었기에 평생 가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막내딸로 곱게 자란 아내를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오게 해 미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아내 역시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결혼했다'고 가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장남한테 시집와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원래 독립심이 강해서 그런지 잘 살아줘서 감사합니다.(웃음)
-자녀에 대한 얘기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기타만 치고 공부에는 소홀해 걱정이 많았으나 아내가 아들 녀석 고등학교 3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년 100일기도와 지극 정성을 드린 결과 마음을 다잡고 자기 길을 가더군요.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대학진학 후에도 아들과의 관계는 원만치 않았으나, 과장 시절 공공기관 체험 리포트를 쓰기위해 제 사무실 근무과정을 체험하고서는 공직에 대한 인식과 저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아주 친근한 부자지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숨가쁘게 생활하다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실텐데요.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까요.
▲스트레스는 부정적이기 보다 긍정의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하나의 자극인데, 본인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테니스공을 벽에 쳐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공을 제대로 치면 볼이 바르게 잘 날라 오고, 잘못 치면 다르게 오는 것처럼 대인 관계도 제가 먼저 이해하고 상대방에게 잘해주면 원만한 대인관계가 될 것이고 부정적인 스트레스도 생기지 않습니다. 생활하면서 업무적 부담감이나 직원 간 대화에서 답답할 때면, 가볍게 걸으면서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생각의 전환 등을 해보는데요. 이를 통해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행복도시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행복도시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준비해온 도시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도시입니다. 대덕특구와 오송오창단지가 입지하고 있고, 대전과 청주, 천안 등 탄탄한 배후도시가 있어 범충청권을 아우르는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도시입니다. 기존 도시가 안고 있는 교통체증과 환경오염, 주택 및 학교부족 등의 문제가 없는 미래도시로 건설되고 있고, 이를 위해 기존 도시와 다르게 도심중앙을 호수와 공원, 수목원 등 녹지로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둘레에 내부 대중교통중심도로와 외곽순환도로를 투링(TWO-RING)구조로 하는 환상형 도시구조로 설계돼 있습니다.
순환도로 주요 지점을 기준으로 6개 생활권으로 구분해 중앙행정과 문화, 국제비즈니스, 도시행정, 대학ㆍ연구, 보건ㆍ의료, 첨단산업기능을 고루 분산 배치하는 자족형 복합도시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없는 행복도시만의 매력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짧게는 100년, 길게는 500년을 만들어온 외국 도시가 한국인의 관광코스로 자리 잡은 것처럼, 세종시가 외국인들이 찾고 싶은 도시로 성장할 것으로 믿습니다.
-공직 은퇴 후 계획을 밝혀주실까요.
▲경제적인 부문을 생각하기 보다는 국가발전과 사회정책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옛 성인들이 도시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강의했듯이, 공직생활 경험을 토대로 후배들을 양성하고 아이 인성과 자긍심, 애국심 등을 전파하는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후배 공직자나 세종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건축물 등 하드웨어만 가지고는 도시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주민과 공무원들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도시로 발전하며 성장해야합니다. 행복도시 세종시가 인근 주변지역의 빨대효과가 아니라 대전과 청주, 조치원, 천안, 공주 등과 함께 중부권 거대 메갈로폴리스(다핵 도시)를 구축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합니다.
이제는 도시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만큼, 주민들이 이끌어가는 도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담=백운석 세종취재본부장ㆍ정리=이희택 기자ㆍ사진=행복도시건설청 제공
●이충재 행복청장은 누구?
▲1955년 경기도 연천 출생(만58세) ▲학력=경기 동두천중, 서울 용문고,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인하대 교통대학원 경제학과 석사, 단국대 대학원 도시계획 및 부동산학 박사 ▲주요 경력=1980년 1월 7급 공채로 임용, 2006년 7월~2008년 2월 옛 건설교통부 주거복지본부 토지기획관 부동산평가팀장, 토지관리과장, 2008년 3월~2011년12월 옛 국토해양부 주택토지실 토지정책관실 부동산산업과장, 동서남해안권발전기획단 해안권 기획과장, 공공주택건설추진단장,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 2011년 12월~2013년 3월 행복청 차장 ▲신조=진인사대천명(眞人事待天命) ▲가족관계=부인 허정윤, 1남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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