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국모범연합 대전시지부는 1969년 충남도 대전 모범운전자로 출발해 경찰서가 분리되면서 1978년 대전모범운전자로 명칭이 변경됐다. 초창기 10여명의 인원으로 발족했지만, 현재는 회원들이 대거 참여해 거대 연합회가 됐다. (사)전국모범연합 대전시지부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발족된 만큼 역사 또한 깊다.
박창하 지부장은 오랫동안 선배들이 이끌어 온 만큼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전국에서 가장 모범된 연합회로 만들 생각이다. 봄비가 대지를 적시던 지난달 24일 전국모범연합 대전시지부에서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만난 박 지부장의 당차고 힘찬 모습은 신뢰감이 묻어 났다. 해맑은 웃음은 그의 트레이트 마크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선한 인상의 박창하 지부장. 그는 인터뷰 내내 그동안 살아온 인생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편집자 주>
▲박창하 (사)전국모범연합 대전시지부장 |
어린시절 두 분의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아들로 자랐다는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1학년 때 가출을 경험하면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 지부장은 시골에서도 오지에 살아 자동차 구경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한 달에 두ㆍ세번 마을에 들어온 짐차(트럭)를 몰래 타고 가다 어느곳에선가 내렸죠. 지금 생각해 보면 영동읍내였던 것 같아요.”
그의 첫 가출이다. “당시 짐차를 운전하는 운전자의 모습과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어요. 호기심에 짐차에 탄 것이 가출로 이어져 1년 넘게 영동읍내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다”면서 박창하 지부장은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집을 나온 후 1년여간 식당 등을 전전하며 끼니만 해결하고 지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사촌형에게 붙들려 집으로 돌아갔지만, 또 다시 집을 나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
“사촌형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죠. 하지만, 사촌형을 만나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어요. 길을 잃은 후 두렵기보다는 우선 끼니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요. 방황하는 나를 보고 식당에서 거둬줬지만, 성격 탓에 한곳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도망 나왔습니다.”
어린 소년은 또 한번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엔 대전이었다. 당시 나이 16살. “무임승차로 대전에 내려왔다가 방황하던 중 우연히 중앙시장에서 상업하는 분을 만나면서 가족처럼 함께 생활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또 다시 뛰쳐 나왔다.
“나에게 있어 참 고마운 분이었어요. 자식도 아닌데 제가 집을 나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찾았죠.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상업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돈도 많이 벌었어요.”
이런 소년에게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다. 돈이 생기면 어디든 떠나 돈을 남김없이 쓰고 마는 낭비벽이 심했다. “오죽했으면 주인 어른께서 월급을 주지않고 월급대신 땅콩으로 계산해 퇴직할 때 주셨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많은 돈을 만지다 보니 지금까지도 돈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이처럼 14살부터 21살까지 박창하 지부장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결혼과 함께 택시기사로 입사=어린시절 방황은 성인이 돼서도 계속됐다. 1975년 택시회사에 입사했지만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 성격 탓에 두달도 채 안돼 그만뒀다. 그러던 중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 동생의 누나를 만나게 되면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 동생이 현재 처남이죠. 한마디로 말해 동생 누나를 꼬셔 결혼한거죠.”
하지만, 박 지부장은 결혼 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아내 속을 많이 썩였다. 취미가 등산과 낚시인 탓에 집을 비우는 것은 다반사. 그는 가정을 돌보기보다는 밖으로 돌았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물만 보면 정신이 바짝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가정보다는 취미로 자신의 삶을 달랬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내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정상적인 생활이라기보다는 아내 속을 많이 상하게 했죠.”
▲모범운전자 가입 후 바뀐 생활=결혼 후 오랜기간 동안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지냈다는 박 지부장은 모범운전자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된다.
“8년 동안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지 못하고 등산과 낚시 등을 즐기면서 생활했지요. 결혼을 해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게 사실이니까요.”
그는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일은 기필코 해야 하는 성격이었기에 조직생활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88년 알고 지내던 선배의 권유로 모범운전자회에 가입하게 된 후 봉사활동에 매력에 빠지게 된다. 박 지부장은 모범운전자회에 가입하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주변을 다시 돌아볼 수있는 계기가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범운전자회에 가입한 게 너무나 잘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작정입니다.” 그는 봉사활동을 하고 나면 기분이 업그레이드 된다고 말했다.
▲이웃을 챙기는 시간 많아져=“사실 모범운전자회에 가입하면서 가정을 돌보기 보다는 주변을 돌보는 일이 더 많아졌어요. 남들이 필요로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 봉사를 하는 것이 바로 모범운전자회입니다. 아내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하지만, 아내도 이제는 저를 많이 이해를 해주고 있습니다.”
박창하 지부장은 그러면서 “아내는 종교를 통해 어려움을 풀어가고 있다”면서 늘 따뜻하게 대해 준 아내에게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술ㆍ담배NO=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박 지부장은 술을 끊게 됐다. 술 때문에 둘도 없는 친구 두명을 세상을 떠나보냈다. 박창하 지부장은 그 후로 술을 먹지 않는다. 하루 3갑 반 넘게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8~9년 전 폐혈관이 막혀 병원 신세를 지었을 당시 아내가 한 말이 가슴깊이 박혀 담배를 끊는 계기가 됐다.
“아내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당신 살아만 주세요' 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는 아내의 이 말 한마디에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사랑은 조건없이 주는 것=박 회장은 모범운전자회 활동을 하면서 봉사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준 만큼 받으려고 하는데, 사랑은 조건 없이 줬을 때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봉사활동은 조건없이 해야 진정한 봉사활동이라는 것이다. 모범운전자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오전 러시아워시간에 5개 지회 약 40~50여명의 회원들이 교통 혼잡 지역을 찾아 거리질서에 나서고 있다. 특히 비와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신경을 쓴다고 했다.
교통질서뿐 아니라 연중행사로 소년소녀가장돕기, 지역 노인 초청 효도관광, 모금활동을 통한 기부금 전달 등 지역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조건없는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국모범연합 대전시지부는 회원 1인당 1만원씩 내는 회비로 운영되고 있다. 협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회비만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다. 지자체 등에서 홍보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지만, 실질적 운영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박창하 지부장은 “금전적으로 생각하면 봉사를 하지 못합니다. 협회 회원은 봉사를 통해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면서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뿌듯함을 모를 것이다”며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부장 취임소감=그는 취임 소감으로 “전국모범연합 대전지부장은 막중한 자리인 만큼 책임감도 그 만큼 무겁다”며 “1100여명의 회원을 지부장으로 모시며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모범운전자회가 간혹 선거 때 파벌이 생길 때도 있지만, 중부지회장으로써 지회를 이끌었던 경험도 있어이런 파벌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한 그는 “모범운전자는 하나이고, 사랑하고 화합하는 지회로 거듭나겠다”고 강조했다. 회원들이 그릇을 채워주면 지부장으로서 나눠주는 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대담=백운석 경제부장(부국장)ㆍ정리=박병주 기자ㆍ사진=손인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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