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보다는 만화책에 빠져있던 소년, 대전의 문창동 토박이가 '드라마 한류'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겨울연가', '장밋빛인생', '소문난 칠공주', '해를 품은 달', '적도의 남자', '각시탈' 등 수많은 드라마를 히트시키며 세계 속의 한류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김희열(48ㆍ사진)(주)팬 엔터테인먼트 부사장 겸 드라마사업본부 총괄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손대는 드라마마다 소위 '대박' 을 치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지만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굴곡이 있었다.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도전해온 김 부사장은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세 분의 멘토를 만난 덕분”이라며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고교시절 연극에 눈뜨게 해준 도완석 당시 성남고 연극반 지도교사(현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치료학 교수), 공연기획의 새 세상을 알게 해 준 음악평론가 이백천씨,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준 김한길 전 국회의원. 이들 3명의 멘토를 만난 덕분에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인연을 소중히 할 줄 아는 남자' 김 부사장을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옛 상암동) 팬 엔터테인먼트 신사옥 글로벌미디어센터에서 지난 5일 만나 한류 드라마 열풍의 중심에 서게 된 이야기와 멘토 스승들과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첫 번째 멘토와의 만남은 고교 입학하고 1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 당시 미술교사이자 연극반 지도교사셨던 도완석 선생님은 한남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중앙대대학원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계셨습니다. 향토 연극을 위해 대전지역 극단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던 분이셨죠. 우연히 선생님의 '길손'이라는 모노드라마 연극 공연을 접하게 되면서 막연히 저도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선생님을 찾아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 선생님을 못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하곤 합니다.
-도완석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게 된 계기가 영화 '조폭마누라'였다고요?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의 대학생활, 그 뒤 군입대와 사회생활을 거치며 고교시절 선생님은 마음 속 은사일 뿐, 모교로 찾아뵐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2004년 고교 졸업 후 20년 만에 은사님을 다시 찾아뵙게 된 데는 영화 '조폭마누라'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직업상 영화의 자막까지 모두 훑어보는 습관이 있는데 대전에서 촬영된 '조폭마누라'의 자막에 모교인 성남고의 이름이 나온 것을 봤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알아본 결과 은사셨던 도완석 선생님이 교장선생님이 되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터넷에서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머리에 망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위대했던 멘토이자 은인이신 선생님을 이제라도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2004년 20년만의 사제 상봉을 하게 됐습니다.”
-부친께서 연극반 활동을 강하게 반대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당시 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에게 택시운전을 시키는 한이 있어도 연극은 절대 안된다'며 완강히 반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학교까지 찾아와 도완석 선생님께 모욕적인 말씀을 서슴지 않으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연극수업을 중단하지 않으셨던 도 선생님이 계셨기에 연극에 대한 열정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톱 탤런트였던 유지인씨와의 추억도 있다던데요.
“고교시절 유지인씨와의 추억도 생생합니다. 당시 유지인씨가 도 선생님의 대학원 동기여서 도 선생님과 절친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KBS드라마 촬영장을 견학한 후 유지인씨의 집까지 방문할 수 있었고 당시 고등학생 몇 명이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햇밤을 가져갔는데, 유지인씨가 고맙게 받아주셨습니다.
그 뒤로 제가 2009년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제작할 당시 유지인씨를 캐스팅했는데 그때 유지인씨에게 “오래전 도완석 선생님과 녹화장을 방문하고 댁까지 찾아가 햇밤을 전해드린 고등학생”이라고 말하자 유지인 씨도 크게 놀라셨습니다. 이후 유지인씨와 많이 친해지고, 드라마를 마치고도 가끔 인사드리는 관계가 되었죠.”
-대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1965년 대전시 중구 문창동에서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서울 구경 한 번 못해본 문창동 토박이였습니다. 공부보다는 놀기에 열중했고, 교과서보다는 만화책에 빠져 밤새 만화책을 보던 소년이었죠. 당시 신문수씨 만화 '도깨비의 감투', '꺼벙이' 등을 즐겨 보며 만화속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했습니다. 어린 시절 둘째형이 25일 월급날마다 빠짐없이 '어깨동무'와 '소년중앙'같은 월간지를 사다 주었는데 그 잡지들을 읽으며 '만화 속 주인공의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 없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키우며 자랐습니다. 지금 드라마 제작을 하면서 스토리텔링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것도 그 시절 만화책을 보며 키운 감수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명의 형들이 모두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안정된 직장에 다녀 '엄친아' 소리를 들었던 반면 저는 어린 시절부터 형들과는 다르게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만화를 유달리 좋아한데다 엉뚱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죠. 부모님도 막내의 '딴따라 기질'을 일찌감치 파악하셨는지 공부에 특별한 강요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첫번째 멘토인 도완석 선생(왼쪽 사진)과 함께 한 김희열 부사장. 인터뷰 내내 고교시절 추억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모습을 통해 사제간의 끈끈한 정과 믿음을 엿볼 수 있었다. 두사람 뒤로 팬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드라마 포스터들이 보인다. |
“도완석 선생님과 고교시절 2년 동안 연극 수업을 하면서 제게 숨어있던 끼와 재능이 빛을 보는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대입을 앞둔 고3 가을, 서울예술대학에서 설립자인 고 유치진 선생님의 호인 '동랑'을 따서 주최하는 '동랑청소년연극경연대회'에 출전했습니다. 전국 30여개 고등학교 연극반들이 각각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공연하고 평가받는 대회였는데 당시 오영진 선생님의 희곡인 '시집가는 날(맹진사댁경사)'로 최우수 연기상을 받게 됐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격이 생생합니다. 최우수상을 받으니 서울예전 입학 특전이 주어졌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극인으로 생활하기에는 경제적인 상황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본격 연기자의 길을 걷기 위해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연수단원으로 짧은 경험을 한 뒤 서울의 모 극단에서 막내 생활을 하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었죠. 비슷한 수준의 배우지망생은 연극판에도 수백명에 이르고, 어쩌다 방송사 공채 탤런트 시험이라도 볼라치면 30명 모집에 5000명에서 6000명씩 몰려 합격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더구나 부모님이 반대한 연극이었으니, 부모님은 대학 재학 중에는 도움을 주셨지만 졸업 이후에는 손을 벌리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힘든 생활이 이어지는 가운데, 제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두 번째 멘토인 이백천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두번째 멘토인 음악평론가 이백천씨는 어떻게 만났나요?
“3년의 자취생활과 단발성 아르바이트, 연극연습을 전전하며 어렵게 지내는 사이 저의 선배 한분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습니다. 음악평론가 이백천 선생님이 당시 서울예전에서 실용음악과 강의를 했는데 연극과 사무실에 오셔서 음악이나 공연기획에 재능 있는 어시스트를 찾았다는 겁니다. 공연이 없는 3~4개월간 선생님 일을 도와드리고 오라는 선배의 제안이었죠.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기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 선생님의 일을 도와 드리며 음반과 공연기획에 대해서 배우는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2~3개월 이 선생님의 일을 돕다보니 드라마 공연 외에 음반을 기획하고 콘서트를 기획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1992년 결혼 이후에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SK계열사인 SKC의 음향사업부에 홍보 매니저로 채용돼 홍보매니저와 기획, 영업파트 등에서 약 4년간 근무했습니다.”
-잘 다니던 대기업 회사를 그만두고 국회의원 비서생활을 하게 됐는지요?
“기획직으로 본사 근무를 하면서 음악과 녹음실 관리 업무를 했는데요. 연극을 전공하고 배우가 되겠다던 배우지망생이 대기업에서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월급에 영혼을 빼앗겨 버린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그만두게 됐죠. 그리고 역시 아는 분의 제안으로 15대 국회의원인 김한길 의원님의 비서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색다른 체험을 하고 싶은 호기심이랄까. 약 3년간은 국회에서, 1년간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했는데, 이후 지역구로 같이 가자는 김한길 의원님의 제안을 마다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정치가 어렵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시간도 없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과에 회의감이 생겼거든요. 하지만 그 때 김 의원님으로부터 세상을 보는 정확한 눈과 예리한 분석 능력을 많이 배웠기에 그 분을 세 번째 멘토로 생각합니다.”
-그 뒤 지금의 팬 엔터테인먼트로 자리를 옮긴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팬 엔터테인먼트로 자리를 옮긴 뒤 드라마 제작 부서를 만들고 관련된 전공을 기초로 해서 제작 일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당시 드라마 '모래시계'를 만들어 유명했던 김종학 프로덕션의 박창식 이사(현 국회의원)가 저와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였습니다. 동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 이사를 귀찮게 따라다니며 제작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회사 일에 접목해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드라마를 시작했습니다. 초보 프로듀서의 길을 걷게 된 뒤 2년여의 준비 끝에 태어난 첫 작품이 바로 한류열풍을 몰고 온 드라마 '겨울연가'입니다.”
-김 부사장님은 이후로도 제작한 드라마들이 '대박행진'을 이어가면서 입사 14년 만에 부사장이자 드라마사업부문 총괄대표가 되셨습니다. 빠른 승진이 눈길을 끄는데요.
“1999년 경력직 과장으로 팬 엔터테인먼트사에 입사 후 생각보다 빠른 승진으로 임원이 됐고, 회사 전체 매출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드라마사업 부서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직책이 올라가는 만큼 회사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된다는 부담감에 양 어깨가 무겁고, 잠을 편히 이룰 수 없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면 '죽도록 일해도 죽지 않는다'는 한줄 문구를 좌우명처럼 새기고 오로지 일만을 위해 줄기차게 달려온 날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전해주실까요.
“우리 국민들은 드라마를 각별히 사랑합니다.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사랑받는 드라마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해외 시장에 견줘도 손색없는 드라마를 통해 한류를 지속시키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대담=한성일 문화독자부장(부국장)ㆍ정리=김의화 기자ㆍ동영상ㆍ사진=금상진 기자
●김희열 부사장은 누구?
▲1965년 대전시 중구 문창동 출생 ▲문창초ㆍ동산중ㆍ성남고ㆍ1986년 서울예술대 연극과 졸업 ▲1990년 (주)SKC ▲1995년 김한길 제15대 국회의원실 근무 ▲1998년 대통령비서실(정책기획수석실 비서) ▲1999년 (주)팬 엔터테인먼트 입사 ▲현재 (주)팬 엔터테인먼트 부사장 및 드라마사업본부 총괄대표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이사 ▲대표작 '겨울연가', '장밋빛인생', '소문난 칠공주', '찬란한유산', '해를 품은 달', '적도의 남자', '각시탈', '백년의 유산' 등이 있다.
●팬 엔터테인먼트는?
드라마를 통한 한류 열풍의 시초로, 한류의 세계화에 앞장서가는 글로벌 미디어 콘텐츠기업이다. 1998년 설립, 음반과 매니지먼트를 주 사업으로 시작했다. 가수 이정현과 싸이를 데뷔시켜 K-POP의 세계적인 스타 배출과 음악을 통한 한류열풍의 기초를 다듬어놓았다. 음반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드라마가 회사의 대표 콘텐츠가 되었다. 2002년 '겨울연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3편의 드라마를 제작했다. 드라마부문의 지난해 매출액만 약 350억원을 기록했고, 2006년 드라마제작사로서는 최초로 코스닥 직상장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내 13층 건물인 글로벌미디어센터를 준공, 종합콘텐츠미디어그룹으로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콘텐츠의 패러다임을 이끌어 가고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