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3년 2월28일 오전 11시ㆍ3월 1일 오전 11시
▲장소:대전시립미술관 전시실, 최영근 작가 작업실
▲진행=한성일 중도일보 문화독자부장(부국장)
옻은 옻나무의 진액이다. 15년 이상 자란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나무가 만들어내는게 바로 옻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일종의 '딱지'인 셈이다. 100일간 20회에 걸쳐 채취하는 옻은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이라 더없이 귀할 뿐 아니라 최고(最古)의 도료이며 접착제다. 이렇게 옻칠로 완성된 작품은 1만 년을 견딘다. 신비한 재료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긴 시간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국의 대표적인 칠예술(漆藝術)작가로 한 길을 걸어온 최영근 작가의 전시가 오는 31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관장 이종협) 3ㆍ4전시실에서 열린다. 한국전통의 칠예술을 지키며 현대적 감성으로 새로움을 찾는 고된 작업을 해온 최영근 작가의 작품을 참관하기 위해 최 작가의 '현묘지예'전이 개막되던 지난 2월28일 아시아 최고의 칠 예술 대표 작가들이 대전시립미술관 전시실 한자리에 모였다. 최영근 현묘지예(玄妙之藝)전 참관을 위해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오오니시 나가토시(大西長利ㆍ81) 교수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교십광(喬十光ㆍ77) 교수가 함께 대전시립미술관을 찾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중도일보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전통조형문화인 칠 예술계의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칠예, 천 년의 문을 열다'를 주제로 특별기획 좌담회를 마련했다. 각 국 옻칠예 전문가의 좌담회를 통해 한ㆍ중ㆍ일 칠 예술의 현재와 향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오오니시 교수 |
▲교십광 교수=중국의 옻칠 문화는 공예보다 회화쪽으로 상당히 깊이 발전해왔습니다. 과거 중국의 칠화는 회화 안에서 퇴색돼 있었지만, 현재는 칠화의 발전과 활력을 위해 노력중입니다. 저는 칠화가 너무 유화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전통 칠화의 재료 특징과 특성을 잘 유지하고 살려낼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교십광 교수 |
▲최영근 교수=칠공예 작품 속의 자개는 반짝거리는 예쁜 빛, 첨단미래과학의 빛, 생명탄생의 빛 등으로 정의됩니다. 자개는 우리나라 옻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옻칠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옻칠은 1000년 동안 소재 변화가 없었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옻칠의 닫힌 문을 여는 심정으로 '천년의
▲최영근 교수 |
▲한 부국장=오오니시 교수님과 교십광 교수님께서 최영근 교수님의 이번 '현묘지예'전 작품을 감상하신 소감과 최영근 교수님의 작품세계에 대해 들려주실까요.
▲오오니시 교수=저는 2010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최 교수님의 작품전을 보러왔었고, 이번에 두번째로 최 교수님 작품전을 관람하러 왔습니다. 최 교수님의 작품을 보면 깊이와 함께 그 신비한 세계에 빨려들어가 마치 내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번 전시 역시 많은 에너지를 받고 갑니다. 고대 국가가 형성되기 전부터 존재해온 옻칠이야말로 깊이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최 교수님은 의식을 갖고 근본적인 옻칠의 세계를 구축한 것 같습니다.
옻칠에서 검정색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옻칠은 하늘이고 자연의 피입니다. 동양에는 현묘에 대한 사상이 있는데 최 교수님이 주장하고 있는 옻칠에서의 현(玄)의 개념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 교수님이 사용하고 있는 난각(계란, 메추리알 껍데기 등)은 일본, 중국 등 에서 많은 작가들이 사용해오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난각의 흰색은 다른 작가와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최 교수님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아주 세밀한 작업은 그저 단순한 작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깊이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0년에서 2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기도 하는 최 교수님의 고생과 인내는 칠공예를 하는 작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철로변 풍경' 작품에서는 마치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시아를 넘어선 최 교수님의 작품을 서양에서 새롭게 전시해 선보인다면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교십광 교수=최 교수님의 작품을 사진으로만 봐서 실제 작품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최 교수님은 옻칠 색감을 대표하는 검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최 교수님 작품에 나타난 검정색은 그 깊이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런 작품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독창성이 매우 뛰어나 세계에서 유일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속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작가 개인의 특징이 매우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최 교수님은 이번 작품전에서 '자개'와 계란을 이용한 '난각' 등 한국의 전통적인 옻칠을 제대로 살려냈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옻칠과 그 곳에 점점이 박힌 자개와 난각, 금박, 은박, 색편들은 우주를 품은 검은 '玄(현)'을 기조로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한ㆍ중ㆍ일 각 나라마다 모두 옻칠의 색인 '玄(현)'이 있는데, 최 교수님은 그 색의 특성을 잘 살려 표현했습니다. 스케치와 발상, 구성이 좋고 새롭습니다.
▲한 부국장=현대 미술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고 매년 전공자들이 배출되지만, 전통 옻칠 전공자는 소수에 불과한 게 현실인데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무한한 인내가 필요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한ㆍ중ㆍ일 각 나라에서 옻칠 공예를 이어나갈 제자 양성과 더불어 옻칠 공예에 대한 전망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오오니시 교수=젊은 작가들이 얼마만큼 옻칠공예에 대한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옻칠 자체는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는데요. 이 전통을 우리들이 제대로 알아보고 계승시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전망과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옻칠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을 뛰어넘어 더 새로운 생각을 갖고 더욱 더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대감도 적지 않습니다. 미술분야 가운데 옻칠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옻칠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최영근 교수=그동안 우리 조상들에 의해 유용하게 사용되어 온 옻칠의 재건을 다짐하고 수없이 도전해왔습니다. 그 시련의 중심에서 휘청거리고 있을 때도 가슴 한구석에는 자긍심과 뿌듯함이 존재했기에 오늘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옻칠공예 분야에서는 솔직히 새로운 것을 나타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이 두 분 교수님께서 노구를 이끌고 먼길을 방문해주신 것은 제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품들을 보시면서 옻칠에 대한 새로운 방향과 방식의 조형세계가 열렸다고 평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옻칠 사용은 7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아시아 조형문화의 중요한 재료이고 기법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작업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됩니다. 이번 두분 작가의 방문은 작품에 대해 큰 평가를 내린 측면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격려와 무언의 압력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그만두고 싶은데 두 분은 '더 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은 이렇게 나이가 들고, 몸도 불편한데도 쉬지 않는데 '무슨 이야기하냐, 더 가야 된다'고 무언의 애정 어린 압력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열정과 진지함을 보고 느끼는 점이 참 많습니다.
▲한 부국장=최 교수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참으로 아름답고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칠공예 외길을 걸어오신 교수님의 깊은 철학과 내공이 느껴져 외경심마저 들던데요. 한, 중, 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분들께서 한 자리에 모이셔서 서로의 작품을 격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중일 작가 교류전을 한 곳에서 동시에 진행하신다면 각 작품의 특성을 이해하고 비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고 매우 의미있고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최 교수님, 이번 작품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인지요.
▲최영근 교수=저는 이번 작품전을 구상할때 아시아의 가치를 어떻게 현대미술에 드러낼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무거운 사명감을 안은채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정서와 세계적이고 현대적인 것을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지요. 21세기는 아시아, 즉 동방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문명의 중심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미의 기준, 우리와 아시아의 문화에 대한 자존감과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옻칠은 동방의 문명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옻칠이 주는 색감을 저는 옻칠의 미감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2009년 개인전때 도록 작가의 글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옻칠의 미감을 현(玄)의 미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현은 동양사상의 뿌리를 이루는 화두라고 생각하는데 작품 속에 그러한 사상이 담기도록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 재료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고 우리나라 자개공예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했죠. 이번 작품전은 세계 미술사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드러낼 수 있도록 수많은 시간 인고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온갖 열정을 쏟아 작업한 결과입니다. 일본에서는 형태를 단순화한 형식을 '젠(zen)스타일'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렇듯 일본에 '젠스타일'이 있다면 한국에는 '현스타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작품 속에 담았던 현의 미감을 형식화하는 것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천년의 문을 연다'는 마음으로 20여년 동안 꾸준히 옻칠 외길을 걸어온 만큼 한국 옻칠이 세계화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한 부국장=대전시립미술관에서 칠예술 분야의 작품 전시를 갖는 것은 개관 이래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실까요?
▲최영근 교수=우리나라 전반이 그렇겠지만 대전시립미술관에서도 그간 서양화 등 일부 분야의 전시에 치중돼 있던게 사실입니다. 상업적으로 기획된 외국작품 임대 전시에 큰 의미를 두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가 우리의 가치를 이해하고 확산하는 전시가 되고, 다양한 장르가 소개되는 전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 부국장=오오니시교수님과 교십광 교수님은 81세, 7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 먼길을 오시면서 예술가로서의 빛나는 열정을 보여주셔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오한 혼이 깃든 정제된 작품으로 관람객들에게 옻칠예술의 진수를 보여주신 최영근 교수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예술가의 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현속에 피어난 빛의 꽃'인 옻칠 공예가 일반인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장르가 되길 기대합니다.
대담=한성일 문화독자부장(부국장)ㆍ정리=박수영 기자ㆍ사진=김상구 기자
●토론자 약력
-최영근교수는 1948년 청양 출생. 홍익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동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제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공예부문 대상. 한남대 문과대학장, 초대미술대학장, 기획처장, 부총장 역임. 현 한남대 미술대 디자인학과 교수, 중국 청화대 심천대 겸직교수, 서울시 문화재위원.
-오오니시 나가토시(大西長利)교수는 1933년 일본 시모노세키 출생. 1959년 도쿄예술대학미술학부 졸업. 현 동경예술대학 명예교수. 저서 칠ㆍ칠의 아시아, 세계의 칠ㆍ일본의 칠.
-교십광(喬十光)교수는 1937년 중국 하북성 관도현 출생. 1956~61년 중앙공예미술학원 입학 벽화 전공. 1985년 중국미술가협회 벽화위원 피선. 2002년 중국공예미술학회 칠예전공위원회 회장 피선. 현 중국 청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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