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이]어린왕자 목소리를 볼륨 높여 들어요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이승이]어린왕자 목소리를 볼륨 높여 들어요

[수요광장]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3-02-26 14:43
  • 신문게재 2013-02-27 21면
  •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어린왕자'는 사하라 사막에 홀로 불시착한 비행사가 사막 한가운데서 어린왕자를 만났다가 헤어진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다. 어린왕자가 만난 소혹성 사람들 이야기, 어린왕자와 여우 이야기, 어린왕자와 장미에 관한 이야기 등. 그러나 그림 없는 '어린왕자'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어린왕자'를 읽은 독자라면 책 속 그림 한두 장쯤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 그림들을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어린왕자가 꽃을 유리 덮개로 보호해주는 그림, 바오밥 나무 그림, 어린왕자와 여우가 만나는 그림, 의자에 홀로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어린왕자 그림, 허물어진 돌담 위에 걸터앉은 어린왕자를 뱀이 몸을 곧추 세워 올려다보는 그림…. 무려 50장 가까이 되는 그림 중 보아뱀 그림은 '어린왕자'에서 가장 흥미롭고 인상 깊다.

보아뱀 그림은 무엇으로 보일까? 모자로 보일까?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으로 보일까? 혹시 가느다란 보아뱀 속에 커다란 코끼리가 들어가 있는 그림이 부조리하다거나 황당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린왕자'속 어른들처럼 굳어버린 틀 속에 갇혀 보아뱀 따위의 그림에는 아무 관심 없는 어른임이 분명하다. 틀을 넘어 사물을 자유로이 꿰뚫어보지 못하고 '숫자'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정말로 '중대한 일'이 뭔지 모른 채 늘 설명을 요구하는 어른일 뿐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마음엔 보아뱀 그림이 '생(生)과 사(死)의 변증법'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어린왕자'는 생텍쥐페리가 <헌사>에서 밝혔듯이 '처음에는 모두 어린이들'이었을 어른들에게 바친 동화다. 우리는 어느덧 어른 왕이 돼 버렸다. 눈은 빨라지고 마음은 더욱 바빠진 어른이 돼 버렸다. 어느 시인이 쓴 시구처럼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아이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 중대한 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어. 그 꽃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그 꽃의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만 했던 거야. 그 꽃은 나에게 향기를 풍겨주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었어. 결코 도망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 교활한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거짓말 뒤에는 애정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어. 꽃들은 그처럼 모순된 존재들이거든! 하지만 난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할 줄을 몰랐던 거야.” 꽃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어린왕자!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참을성이 필요한지…. 우리는 정말로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진정으로 '중대한 일'이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 골몰하는 것이다. 어린왕자는 이타심을 소유한 점등인을 유일한 벗으로 삼고 싶어 했다. 가로등을 켜서 별 하나 꽃 한 송이를 활짝 피어나게 하고, 가로등을 꺼서 꽃이나 별을 잠들게 하는 점등인만이 유익한 일을 하는 어른이니까. 그 유익함은 여우가 어린왕자와 작별할 때 속삭였던 비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을 볼 줄 아는 '마음눈(心眼)'에서 비롯된다. 그 마음눈을 되찾게 되면,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꽃이 한 송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어린왕자'를 스무 번도 넘게 읽었다. 그때마다 매번 재미와 감동, 슬픔을 느끼는 것은 엄청난 은유와 상징 때문이다. 1943년 뉴욕에서 처음 발표된 '어린왕자'는 세계를 통틀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한다. 1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ㆍ출간되었고, 한국에서도 300여개의 번역본이 존재한다고 하니 어쩌면 '버섯'의 삶을 살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어른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지도 모르겠다. 법정 스님도 가고 팠던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 <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찬탄했다. “네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 해. 그건 영원한 영혼의 모음(母音)이야. 아 이토록 네가 나를 흔드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른들처럼 말할 때마다 '어린왕자'의 목소리를 볼륨 높여 들어야 한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어린왕자를 찾아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2.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5.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1.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2.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3. [화제의 인물]직원들 환갑잔치 해주는 대전아너소사이어티 117호 고윤석 (주)파인네스트 대표
  4. 생명종합사회복지관, 마을축제 '세대공감 뉴-트로 축제' 개최
  5.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사랑의 오누이 & 사랑 나누기' 결연활동한 동방고 국무총리 표창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