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문학관이 수많은 우여 곡절과 난관을 극복하고 단장을 마친 뒤 지난 해 12월27일 대전시민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이에 지난 12일 동구 용전동 천주교 대전교구청 인근에 위치한 대전문학관을 찾아가 대전문학관 탄생의 주역인 우촌(愚村) 박헌오(64ㆍ사진) 대전문학관장을 만나 문학관과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산내면사무소 서기보에서 시작해 대전시청 문화체육국장을 거쳐 동구청 부구청장을 지내고 이제 대전문학관 초대 관장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시조시인이자 베테랑 문화 공직자인 박헌오 관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대전문학관 문화사랑방 문풍지 창문밖에서는 소담스런 하얀 눈이 목화송이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정겨운 차창밖 풍경과 고풍스런 정취를 자아내는 문학사랑방에서 박헌오 관장과 나누는 대화는 샘이 깊은 물을 마시듯 오랜 체증이 씻기는 듯한 시원스러움을 안겨줬다.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이어 문학관의 산증인으로서 대전문학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은 '지(知)의 거장' 다웠다. 겨울 바람조차 길들일 수 있을 듯한 해맑고 따뜻한 성품 덕일까.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보이는 박 관장으로부터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그의 인생사와 앞으로 이끌어 갈 대전문학관에 대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편집자 주>
▲전쟁 속 두려움에 떤 꼬마 박헌오=그가 태어난 곳은 충절의 고장 예산이지만 어린 시절 성장한 곳은 당진군 순성면 작은 마을이다. 6ㆍ25전쟁 직전 1949년 세상의 빛을 본 박 관장은 어린 나이에 폭격을 피해 피란을 다니던 당시의 무섭고 아팠던 기억을 풀어냈다. 꼬마 박헌오는 장난기 많은 형제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낼 때면, 어린 나이에도 귓속에 맴도는 폭격소리에 놀라 문밖으로 숨곤 했던 겁많은 어린 소년이었다. 공직생활과 유림활동을 했던 그의 아버지는 아주 빈틈없고 정확한 분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공직생활을 하시다가 성균관장을 하셨어요. 엄격하신 아버지와 전쟁이라는 두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 겁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돼요.”
그 당시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박 관장은 5형제 중 막내인 터라 물질적인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형제들까지 많으니 막내인 제가 공부하기엔 어려움이 많았죠.”
▲방황의 끝에서 만난 문학으로 문학소년의 꿈을 꾸다=중학교 시절 대전으로 유학 온 박 관장은 당시 후지무라 미사오의 '자살론'이 팽배하던 시기와 맞물려 방황의 길에 빠지게 된다. 후지무라 미사오는 18세에 '암두지강'이라는 시를 나무에 새겨놓고 케곤노타키 폭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일본 명문고 엘리트 학생으로, 그의 죽음이 세상에 전해지자 청소년들 사이에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 4년동안 185명이 폭포에서 몸을 던져 사회적 물의를 빚게 했다.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 소년 박헌오가 염세주의적 인생관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방황의 끝에서 소년 박헌오는 우연히 '문학'을 접하게 된다.
당시 박 관장은 자살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간절한 기도로부터 시작해 안 해본 게 없었다고 한다.
펜을 잡고 글을 쓰고 있노라면 헛생각을 하지 않게 돼 글을 쓰게 됐고, 그렇게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2학년때 우연히 청소년 대상의 유일한 잡지였던 '학원'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한 후 본격적인 문학동인회 활동을 하게 된다. 그 당시엔 학생 문학동인회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머들령, 판도라, 돌샘 문학동인회를 비롯해 대전고 한모문학회, 대전여고 구조문학회, 보문고 보리수문학동인회 등 각 학교별로 문학동인회가 속속 만들어졌다. 당시 박 관장은 '돌샘문학동인회'에서 활동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된다.
김상기 전 대전MBC 사장, 노금선 실버랜드 대표, 손종호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등이 모두 돌샘문학동인회 출신이다.
▲베테랑 문화공직자로서 시를 읊다=학창시절 꿈 많던 문학청년은 잠시 문학을 내려놓게 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바쁜 공직자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당시 그는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대전 대덕군청 산내면 사무소 서기에서 시작해 총무계, 새마을계, 공보계와 연구단지 지원 업무를 맡았던 지방행정 보상계, 위민계 등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맡으면서 '설득의 달인' 소리를 듣기까지 순직을 각오하고 일했던 공직자 시절이었다. 하지만,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학창시절 그의 생명을 구했던 문학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다.
40여년의 공직생활 가운데 16년을 문화관련 부서 업무를 맡았으니 늘 문화와 함께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덕군지 창간 추진, 문화재 조사 등 문화와는 끊을 수 없는 업무들을 맡으면서 문화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졌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바쁜 공직생활 중에도 1987년 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아 시조시인으로 등단하며, 문학과 또다시 마주하게 된다.
“꽃이 피면서 향기 없는 꽃은 없어요. 나는 향기를 지닌 꽃이고 씨앗을 만드는 꽃이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꽃이랍니다.”
그의 말에서 '문학전도사'로서의 열정이 묻어났다.
▲제 2의 인생, 문학관 주인이 되다=“대전문학관에는 '문학의 숲'이 있고 그 속에서 문학의 나무가 자라요. 숲은 생기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그 속에서 생각과 언어를 제공해주죠.”
서양화가이자 미술학 박사인 김정화 화백이 기증한 작품 '문학의 숲'이 대전문학관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을 반겨주는 곳에서 박헌오 관장이 전해주는 말이다.
“문학관의 비전은 '문학으로 꿈꾸다'이고, 문학관의 미션은 '시민과 함께 가꾸는 문학관'이랍니다.”
대전문학관을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문학 사랑방으로 만들기 위해 박 관장은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전문학관 명예관장이자 초대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시민과 함께 가꾸는 문학 사랑방으로 만들어야 하는 중책이 그에게 주어진만큼 단 하루도 쉴 틈이 없다.
박 관장은 문학관 개관 전에는 개관준비위원장으로 온 정열을 불살라 일했고, 이제는 초대 대전문학관장으로서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인들의 작품을 유족 한분 한분이 기증해 주실때마다 '자네믿고 주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잘 보존해야 한다는 부담이 큽니다. 유족들은 그야말로 자자손손 물려줄 가보를 내놓은 것이니까요.”
박 관장은 올해 대전문학관 운영에 관한 디자인을 끝냈다.
대전문학의 역사를 알고, 문학을 체험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내용으로 상설전시회를 열고 대전문학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풍부한 박 관장은 독특한 전시도 계획중이다. 바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시화전이다.
“지도층 인사들이 사회활동에 바쁘지만 문학적 감성을 갖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도와 참여도를 높이면 문학관을 사랑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
시민과 함께 가꾸는 대전문학관을 구상해 오면서 그는 문학과 더 깊은 사랑에 빠졌다.
박 관장은 이제 대전 시민들이 문학사랑에 함께 빠져 대전문학관을 애용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문학으로 꿈꾸는 대전문학관=대전문학관이 개관한 후 '시민들이 어느 정도나 이용할까', '관심은 얼마나 있을까', '문인들은 문학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초대 관장을 맡은 박 관장 역시 기대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걱정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있게 '희망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태교에서부터 유서까지,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의 모든 과정이 다 문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죠.”
문학관의 손님은 문인을 비롯해 태중의 아기로부터 어린아이, 청소년, 성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관에서는 문학단체들의 자체적인 문학활동과 출판기념회, 민간어린이집 회장단 총회 등 다양한 장르의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문학이 바로 생활의 일부분임을 보여주는 일례다.
“나는 얼마나 보람 있게 살았는지, 내 삶에 얼마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 종합적으로 결실을 맺게 해주는 게 바로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순박한 사람들의 마을'이란 뜻을 지닌 '우촌'을 호로 갖고 있는 박 관장은 '자강불식(自强息)'이 생활의 기조라고 했다. 쉬지 않고 늘 부지런히 자기 앞길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인 '자강불식'의 삶을 사는 박 관장과 함께 문학의 숲에서 문학나무가 있는 오솔길을 따라 문학 사랑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대담=한성일 문화독자부장(부국장)ㆍ정리=박수영 기자ㆍ사진=손인중 기자
●박헌오 관장은 누구
▲1949년 예산에서 출생하고 당진에서 자람 (전 성균관장 박중훈씨의 5남 ) ▲충남중, 대전상고, 대덕대학 졸업 ▲가족:부인과 2녀 1남 ▲취향:연보라 색을 좋아하고, 동요와 가곡을 즐겨 부르며, 문인화에 심취중 ▲공직경력:1970년 9급공무원으로 산내면사무소에서 새마을운동 담당, 대덕군 새마을계장, 공보계장, 도시행정계장, 대전시 국토미화계장, 위민실장, 대전시 문화예술계장, 문화예술과장, 문화체육국장, 교통국장, 공무원교육원장, 시의회 의사담당관, 총무담당관, 대전시 동구 부구청장, 대전문학관 명예관장, 개관준비위원장, 초대관장 ▲문단경력:1987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및 시조문학추천으로 시조로 등단, 대전문협, 대전시조시인협회. 호서문학회, 가람문학회 등에서 활동.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시조사랑운동 본부 부회장, 대전시조시인협회장 ▲저서:석등에 걸어둔 그리움의 염주 하나, 산이 물에게, 우리는 하얀 솔잎이 되어, 그 겨울 이야기 ▲화단경력:한국 서예문인화 대전 삼체상 및 특선, 대전시전 특선 및 입선, 한국문인화대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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