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구 큐레이터 |
젊은 미술인들에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의 지원은 확대되어야 하고 시스템도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누구에게나 무조건 배분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지원은 이른바 가능성이나 잠재력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을 택해 대학공부를 하기로 했다면 기본적으로 예술적 재능은 갖추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그 재능을 충분히 끌어내고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된다. 한데 미술에서 재능은 대상을 실물처럼 잘 묘사한다거나 색채나 형태를 아름답게 구사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훌륭한 미술작품을 위해, '미술이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은 결국 세계관, 인생관, 자연관 등의 보다 근본적인 인간 본연의 문제들, 그리고 역사관, 사회관 등 삶과 관련한 문제들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미술작품은 미적인 재능과 이러한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인상파니 입체파니 하는 유파도 결국은 그러한 미술 내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다른 관점을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미술을 주장하는 목소리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은 일제가 서양에서 배워 이식한 형태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도제식 교육 시절에 가까운 방식이다. 이러한 점은 예술을 꿈꾸는 젊은 학생들이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의 바탕 위에 실현할 수 있도록 그 길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아쉽다. 사실 이는 미술만이 아닌 우리나라 학교교육 전반의 아쉬움이다. 일부 교수들의 노력만으로 변화가 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그냥 재미있어서 해봤어요”, “효과가 좋은 것 같아서 계속 해보려고요”라는 식의 대답 밖에 들을 수 없는 허탈한 상황에서 잠재력과 경쟁력을 갖춘 미래의 예술가는 나오기 어렵다. 어디를 가더라도 평생 미술을 업으로 삼은 이들은 깊이 있는 작품과 껍데기만 있는 작품을 대번에 구별해 낸다. 또한 요즘 같은 시절, 좋은 작품은 어디에 있던 그들의 촉수를 피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통찰력이나 깊이가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만 얻는 것은 아닐 것이며, 좋은 작품의 조건이나 재능도 한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기능은 다소 거칠더라도 자신의 견해와 신념을 다듬어 미적으로 구현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치는 것도 필요한 교육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젊은 예술인에 대한 지원도 바로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찾아내어 도움을 주는 일이다.
미술도 요사이 개념이나 범주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도대체 이것이 미술인가' 하는 당혹스러움이 앞서는 미술이 더 많이 눈에 띠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만큼 미술을 둘러싼 생각들이 급진적으로 변화ㆍ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미술도 변화하고 진화한다. 흔히 말하는 '유기체'처럼. 그리고 그 변화는 다름 아닌 오래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서 비롯하는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학교 교육도 그런 힘을 길러주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지원을 마구마구 해주어야 할 더 많은 젊은 예술인들이 생겨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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