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이야기 속에 사랑으로서의 장발장과 법의 화신으로서 자베르 경감이 나타난다. 법이 현실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과연 현실 속에 법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말한다.
법은 어느 순간에도 이 세상을 변화시키길 원치 않으며 좋든 나쁘든 현재 그대로의 세상만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세상을 부인하는 행위를 밀어내고 쫓아내고 격리하려고 한다고. 법의 역할이란 가능한 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의 현실이 불합리하다면 그러한 세상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지키는 것이 과연 법으로서 역할이고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불합리하지만 질서를 위하여 그러한 사회를 유지하려는 법과 현실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이러한 법에 대항하여 이를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많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바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베르 경감 자살의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좀 더 비약을 시키면 법의 근본문제, 바로 법철학적인 문제로서 법실증주의자들과 자연법사상가들 사이의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법실증주의자들은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법이란 법이 법이라고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법을 정의함에 있어서 법은 '주권자의 명령'이라는 견해를 그들의 논거로 한다. 이에 반하여 현실 속에서 법은 자연의 법칙, 자연적 질서 (정의)에 맞는 법이 진정한 법이며 이러한 자연적 질서에 반하는 법이라면 이에 저항할 수 있고(저항권) 이를 통하여 올바른 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자연법사상가의 논거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베르경감은 철저한 법실증주의자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법은 이러한 자베르와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조인들 자신이 자베르와 그리 멀지 않은 친인척관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통해 이러한 법의 불합리함을 사랑의 법으로 넘어서려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법에 희생된 장발장을 통하여 그의 사랑으로 현실의 법을 극복하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법이 승리하였음을 자베르의 자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어떠한가? 장발장보다는 오히려 자베르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그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변치 않을 진리인 것이다. 때문에 현실에서는 이야기처럼 결코 자베르는 사랑 때문에 고민도 하지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희희낙락 행복한 자베르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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