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몸의 노화가 가장 빠른 곳이 눈이다. 어느날부터 화장품이나 약의 사용설명서의 깨알같은 글씨를 볼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의 민망함과 나이듦에 대한 낭패감이란! 사람이 늙는다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봄과 여름에 푸르른 신록을 자랑하던 나무가 가을이 되면 잎을 떨궈 쇠락의 길로 접어들듯이 말이다. 팽팽한 피부는 느슨해지고 윤기를 잃게 된다. 근육조직은 점점 굳어지고 세포재생이 둔화된다. 하나 둘 늘어나는 흰머리와 기억력의 감퇴….
노화 즉, 늙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노인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동일시는 젊은 사람에겐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화 '아무르'는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장작답게 명불허전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미하엘 하네케의 신작이다. '아무르'는 관객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이 영화가 환기시키는 고통은, 사람이 늙는다는 것이며 늙어서 질병을 피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병으로 인해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남편 조르주 역의 장 루이 트랭티냥이다. 하네케는 조르주 역에 트랭티냥을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다고 한다. 그만큼 이영화에선 병들어 죽어가는 아내 안느의 고통보다는 간병하는 남편의 심리에 무게를 뒀다. 장 루이 트랭티냥은 영화 '남과 여'의 지적이고 무심한듯 큰 눈과 육감적인 입술이 매력적인 배우다. 그런 남자가 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주름과 파인 볼에다 구부정한 어깨의 팔순노인이 됐다. 그 배우의 현재의 '늙은' 모습이 영화의 본질을 말해주었다.
어느 철학자는 죽음은 증명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죽음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특히 뜻밖의 죽음의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느낌으로 되살아온다.
나의 언니는 나이 60을 앞두고 지난해 봄 죽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사실성'을 실감할수 없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인 각자의 죽음”이라고 김훈이 말했듯이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를 잃는 경험을 했음에도, 나에게 죽음은 여전히 하나의 '상상'에 머무른다.
프로이트는 “모든 삶의 목적은 죽음이다”라며 '죽음본능'을 주장했다. 즉, 모든 생물체의 원초적 본능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란다. 거친 파도, 포식자들의 공격을 무릅쓰고 태어난 곳으로 귀환하는 연어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귀향'하는 과정은 큰 축복인지도 모른다.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노인은 추하고 늙은 가여운 대상이 아니라,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펄떡이는 연어같은 사람이다. 이스트우드는 다수의 걸출한 영화를 환갑을 넘긴 나이에 만들었다. 진중한 사유가 묻어나는 '그랜 토리노'는 여든이 다된 나이에 감독한 작품이다. 그는 이전보다 더 늙었지만 활력이 넘치는 정력가다.
그러나 현실의 노인세대는 젊은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진다. 서로를 공감하는 일이 어렵다. 세대간의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범신은 소설 『은교』에서 “노인의 욕망은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화 '죽어도 좋아'는 노인의 성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다뤄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노인이 아닌 세대로서는 생경하기만 하다.
특히 18대 대선에서 노인들이 박근혜에게 표를 몰아줬다는 이유로 세대간 갈등이 깊어졌다. 거기다 박근혜 당선인이 노인기초연금 재원을 국민연금에서 충당한다고 밝혀 젊은층의 반발이 클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노인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고 가난하다. 생계비, 용돈이 필요해 일하고 싶어하지만 폐지를 모으는 일밖에 없다.
노화와 죽음은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역시 그것들을 비껴갈 수 없다. 어느 진보논객의 말처럼 “노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 역시 우리처럼 비천한 자들(Les Miserables)” 아닌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