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의 카피가 '치명적인 왕실비화'다. '로얄 어페어'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의 '천일의 앤'을 떠올리게 하는 왕실 스캔들이다. 덴마크 왕실의 이야기라는 점이 낯설지만 만듦새는 할리우드 시대극 못지않다. 반응도 좋다. 지난 베를린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왕비 캐롤라인과 크리스티안 7세, 왕의 주치의인 요한 스트루엔시의 기묘한 삼각관계가 기둥줄거리. 덴마크 왕비로 간택된 영국 소녀 캐롤라인. 크리스티안 7세를 처음 만난 날, 크게 실망한다. 경박한 말투와 행동으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밖으로만 나도는 왕에게 지쳐가는 그녀를 왕의 주치의로 궁에 들어온 요한 스트루엔시가 부축해준다. 캐롤라인은 루소와 볼테르를 읽게 하고 자유와 계몽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요한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요한을 사랑한 것은 왕비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병적인 기질을 이해해주는 요한에 대한 크리스티안의 애착은 신하에 대한 총애를 넘어선다.
왕비와 주치의의 '위험한 관계'는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연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은 사랑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머리를 맞대고 루소와 볼테르를 논하는 장면에서 빛난다. 금지된 사랑을 한 축으로 삼되 정작 반짝이는 것은 계몽주의 사상과 개혁, 역사의 수레바퀴에 대한 성찰이다.
요한은 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천연두 예방접종, 검열폐지, 고문금지, 출판의 자유 등 개혁적인 조치들을 쏟아낸다. 그런 그를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좋아할 리 없다. 요한을 제거하려 드는 귀족들에게 스캔들은 맛좋은 먹잇감이 된다. 자신들을 위한 개혁임에도 급진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백성들도 요한에게 등을 돌린다.
니콜라이 아르셀 감독은 역사와 사랑 등 풍부한 소재를 멋 부리지 않고 차분히 끌고 나간다. 덕분에 치명적 사랑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지적 즐거움이 살아난다. 금지된 욕망과 권력 다툼에 탐닉하는 궁중 치정극으로도, 사회 변혁을 다루는 정치극으로도 성공한다. 요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지만 크리스티안 7세의 아들 프레드릭 6세는 덴마크의 계몽주의를 이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도는 듯해도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대전아트시네마 상영 중.
안순택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