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오늘 뜨는 해가 어제 진 해와 다를 리 없지만 굳이 어제와 오늘, 지난해와 올 해를 구분해 놓은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라는 뜻일 것이다. 오늘은 밝은 희망만을 이야기해야 할 새해 벽두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새해 새 아침에 어울리는 영화다. 희망을 말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와 가족은 정부 지원금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배는 폭풍우에 침몰하고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하이에나, 오랑우탄, 다리를 다친 얼룩말만이 살아남는다. 굶주린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보트에 숨어있던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나타난다. 결국 보트에는 파이와 호랑이만이 남는다.
영화는 파이가 호랑이 파커와 구명보트에서 보낸 227일간의 기록이다. 소년과 호랑이가 동행하는 단순 구조지만 원작 얀 마텔의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는 만만한 텍스트가 아니다. 삶과 죽음, 공존의 방법, 대자연의 경이로움, 신과 종교, 속죄와 구원 등 다양한 코드가 담겨 있다. 이안 감독은 이런 코드들을 더할 나위없는 연출력과 3D의 기술력을 빌려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이안 감독은 망망대해처럼 깊고 추상적인 원작의 의미를 촘촘한 그물마냥 건져 올린다. 따라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감동이 달라진다. 파이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는 희망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절망 속에서도 파이가 끝끝내 놓지 않는 믿음은 '신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소년이 호랑이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호랑이를 굶겨서도 안 된다. 굶주린 호랑이는 소년을 먹어치울 것이다. 생존 거리를 두고 호랑이를 어르고 달래는 소년의 모습에서 악몽과도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기술'을 발견할 수 있다.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변화무쌍한 바다와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 공중으로 솟구치는 대형 고래, 밤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해파리떼,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날치떼, 신비스러운 식인섬과 미어캣 무리 등 이안 감독이 그려낸 자연은 황홀경이다.
구조된 파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동물과 사람을 바꿔놓고 들려주자 그제야 사람들은 믿는다.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다. 그리고는 “신을 믿는 것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신과 종교에 대한 성찰이 묵직하다.
3000명 중에서 선택된 수라즈 샤르마의 연기도 좋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야위어가고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걸맞게 표현해낸 눈빛 연기는 딱 파이다. 으르렁거리고 스크린을 할퀴어대는 호랑이 파커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렸다. 털 한 올 한 올이 손에 잡힐 듯 정교하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영화다. 소년의 의지에 감동하든, 영상미에 취하든, 신과 종교에 대한 성찰을 떠올리든, 여럿 또는 모두를 함께 느끼든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렇게 들려준다. “당신은 어느 이야기를 믿고 싶은가. 그 믿음이 바로, 당신이 보는 세계다.”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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