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수 두리한의원 원장 |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란 유명한 연설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1929년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학이나 법학 분야로 나가려고 했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소로와 간디에게 큰 영향을 받고 부친의 희망대로 목사가 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극악한 인종차별국가였다. 흑인들은 엘리베이터조차 백인과 함께 탈 수 없었고,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1차ㆍ2차 세계대전 동안 흑인들은 전쟁에 참전해서 군인으로 싸우거나, 군수공장 등에 취업해서 사회적 의식과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1910년에 결성된 전국유색인지위향상위원회는 이런 흑인들의 사회적 법률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고,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킹 목사가 공식무대에 등장하기 이전인 1954년에 흑인 학생도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물론 수십 년간에 걸친 극심한 테러와 탄압으로 수많은 흑인이 희생으로 일궈낸 값진 결과였다.
킹 목사는 1955년 로지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 안에 있는 백인 전용 의자에서 앉아서 벌어진 일련의 대규모 흑인인권운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단번에 흑인지도자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63년, 역사에 남을 위싱턴 행진을 이끌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법안 지지를 위한 워싱턴 대행진은 흑백 참가자 25만명이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이 자리에서 길이 기억될 명연설인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로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게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 대한 그의 불타는 신념을 웅변했다. 결국, 1964년 미국에서 흑백 간의 평등을 천명한 민권법이 통과됐고, 그의 헌신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보답을 받았다.
그때까지 킹 목사의 일관된 노선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였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킹 목사의 이미지 또한 거기까지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이 숨어 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 다시 말해서 백인 프로테스탄트가 주류였던 미국 사회에 흑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꿨다. 실제로 그의 인권운동에는 수많은 백인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 지지가 이어졌고 킹 목사는 투표권이나 흑백차별철폐와 같은 법률 개정을 통해 그런 세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1965년 LA 흑인빈민가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킹 목사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한다. 투표권이나 인권법만으로는 빈곤층 흑인의 경제적인 문제와 뿌리깊은 인종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경제적인 평등이 없으면 자유도 생명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킹 목사는 “신성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과격하게 변해갔고, 마침내 월남전을 일으킨 미국은 망하고 말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비폭력 노선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백인들과도 결별하고 흑인 빈민가로 거처를 옮겨 진정한 해방을 위해 싸우던 킹 목사는 1968년 극우파 백인에게 저격당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 칼럼이 발표될 때면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두 후보 중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진정한 정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해야 이뤄진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킹 목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꿈꾸기가 경제적 평등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재벌에게 퍼준 세금이 8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노동자 두 명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인 우리나라는, 바로 그런 정책을 그만두고 사회적 약자가 중산층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정책을 펼 때만,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꾸는 데도, 돈은 필요하다. 개인에게 주는 돈이 아니라 사회적 평등을 위해 나라 안의 재화를 고루 분배하자. 새 정부에게 바라는 소망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