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영]시골학교의 큰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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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영]시골학교의 큰 보람

[교육단상]서민영 서산 고북중 교사

  • 승인 2012-12-04 14:08
  • 신문게재 2012-12-05 20면
  • 서민영 서산 고북중 교사서민영 서산 고북중 교사
▲ 서민영 서산 고북중 교사
▲ 서민영 서산 고북중 교사
창문 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시골의 정겨운 냄새. 학생들이 '~냄새'라며 인상을 찌푸릴 때도 난 가끔 향긋하다고 생각이 드는 건 어릴 적 시골에서 할머니와 생활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고민은 시골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아닌 여기 시골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됐다.중학교 1학년. 첫 영어 수업. 나름 재미있게 수업을 준비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났다. 영어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1학년이잖아, 애들이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텐데 발음 기호를 읽지 못하고 영어사전을 찾지 못하고 아는 단어가 많지 않다.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라고 혼자 생각하며 2, 3학년 수업을 들어갔다. 그런데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교생의 절반이 영어를 읽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영어기초 실력 쌓기 수업에 돌입했다. 정말 발음기호 하나도 모르는 학생들은 따로 남겨 보충수업을 시켰다. “아, 브, 에, 크….” 하며 아이들은 발음을 익혀갔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노력한 끝에 영어책을 한 줄 아니 한 단어도 읽을 수 없었던 아이들이 떠듬떠듬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특별 발음 훈련을 받은 학생 중 한 명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샘!”

“응, 왜?”

“영어가 재밌어요.”

“그래? 모르는 걸 알게 되는 즐거움이 아주 크지.”

“네 그런 거 같아요. 흐흐흐.”

덩치는 큰 남학생이 수줍은 듯 웃으며 던진 대답이었다. “더 열심히 하면 나중에 전교 1등 하겠다. 기대할게”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내 마음에 아주 행복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런데 보람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나가듯 내뱉은 말이 현실이 된다는 기대처럼 그 학생이 정말 그 후로 영어 실력이 쑥쑥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 두 달이 또 지나갔다. 영어 교사로서의 회의감이 점점 짙어질 무렵 나에게 또 다른 희망이 찾아왔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유난히 수줍음이 많고 자신감이 부족하다. 그러니 영어로 말할 때는 오죽할까. 그래서 목소리도 키우고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고 흥미를 높여주고자 큰소리로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우리 학교만의 영어 수행평가 방법을 고안해냈다. 성적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쉬는 시간 혹은 점심때 나를 찾아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이 연습해온 부분을 펴서 읽었다.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여러 번 당부해도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행평가 마감할 때가 다가오자 아이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90여명의 수행평가를 혼자 감당해야 하기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나로서는 한 번에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을 한꺼번에 평가해야했다.

“선생님 저 여기 할게요.”

“선생님 저도 여기서 할게요.”

“그래? 그럼 목소리 안 들리면 무효야. 큰소리로 알지?”

그렇게 단체 수행평가가 이루어졌다.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나에게 들리게 해야 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점심 후 산책하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영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늘어갔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겠지 하고 기대 없이 시작한 일에서 뜻밖의 결실을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아주 힘들 거라 생각한 시골 학생들과의 영어수업. 어디서 어떻게 아이들이 영어에 대한 흥미를 느낄지 모르고 여전히 이 아이들과의 수업이 힘들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면 영어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희망적인 일들이 많이 보이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안고 나는 오늘도 수업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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