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의 계절이어선지 사회정치적 성향의 영화가 줄 잇는다. '남영동 1985'는 고문을 통해 '시대의 폭력'을 고발한다. 구타, 물고문, 고춧가루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세밀화 그리듯 묘사한 장면들은 고통스럽다.
원작이라 할 자서전 남영동에서 고 김근태 의원은 이렇게 썼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 그렇게 그는 결국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문 장면들에서 사람과 짐승은 종이 한 장 차이임이 느껴진다.
'돈 크라이 마미'는 2004년 경남 밀양시에서 발생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는 성폭행 당한 딸을 대신한 엄마의 복수극을 그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들 영화는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기억하라, 분노하라, 그리고 잊지 말라는 것이다.
어제 개봉한 '26년'도 '분노의 영화'다. 1980년 '그날', 광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의 군대가 본분을 저버리고 자신들이 지켜야 할 국민을 외려 무참히 학살했다. 민주주의, 군부독재 반대를 외쳤다는 이유로, 그저 그 주변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시민들은 희생됐다. 3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시민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가슴에 깊은 상처를 지닌 채 살고 있다.
반면 계엄군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지시하고 발포를 명령한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됐고, 감옥에 들어갔나 싶더니 금세 나와서는 재산 추징 요구에 “통장 잔액이 29만원”이라고 답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5월 광주'와 연관된 조직폭력배, 국가대표 사격선수, 현직 경찰, 대기업 총수, 사설 경호업체 실장이 26년 후 '그날', 학살의 원흉인 '그 사람'의 단죄를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5월 광주'의 비극을 애니메이션으로 묘사한 시작부터 눈길을 확 잡아끈다. 지난해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던 '오돌또기'가 그린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보다 울림이 크다. 창문을 통해 날아온 계엄군 총탄에 어머니를 잃은 미진(한혜진), 야산의 시체더미 속에서 아버지 시신을 발견한 진배(진구),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탄에 누나를 잃은 정혁(임슬옹). 26년 뒤 미진은 국가대표 사격선수의 꿈을 접었고, 진배는 조직폭력배로 살고 있고, 정혁은 경찰이 되어 '그 사람'이 외출할 때에 맞춰 신호등을 조작한다. 이들 앞에 대기업 총수인 김갑세 회장(이경영)과 그 양아들이자 비서인 주안(배수빈)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암살하자는 제안을 한다.
분노가 차오르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느린 템포가 아쉽긴 하지만 중요 장면마다 극적 긴장감을 높인 솜씨가 돋보인다. 미진이 횡단보도에 서서 '그 사람'을 총으로 겨누는 1차 암살시도 시퀀스는 심장을 멎게 만든다.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도 좋다. 특히 진배 역의 진구는 조폭다운 저돌성과 능글맞은 연기를 오가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한혜진의 서늘한 눈빛도 압권이다. '그 사람' 역의 장광은 정말 '얄밉게' 그려낸다.
그래서 '그 사람'을 죽이느냐고? '26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정혁이 누나를 떠올리며 쏟아내는 대사에 들어있다. “어른이, 경찰이 돼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조근현 감독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스스로 사죄하지 않는다면 단죄라도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차원에서 연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 현실에서 라스트는 씁쓸하다.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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