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곶감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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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곶감 유감

[세설]한일수 두리한의원 원장

  • 승인 2012-11-14 14:16
  • 신문게재 2012-11-15 21면
  • 한일수 두리한의원 원장한일수 두리한의원 원장
▲ 한일수 두리한의원 원장
▲ 한일수 두리한의원 원장
진눈깨비 내리는 아침 출근길, 유성구에서 나눠준 조끼를 입고 손에는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쥔 할머니 십여 분이 담배꽁초를 줍고 계신다. 오도마한 체구에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머리엔 싸구려 스카프를 되는 대로 두른, 일흔은 일찌감치 넘어 보이는 할머니들이 묵묵히 쓰레기를 줍는 사이로, 내가 걸어간다. 옛날이야기 몇 가지, 두서없이 떠오른다.

지금부터 20년도 한참 전의 11월, 나는 장가를 간다고 헤헤 호호거리며 다녔다. 그 꼴이 자못 한심하셨던지, 일흔을 넘긴 고모님이 나를 부르셨다. “얘야, 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언지 아니?”

“글쎄요. 호랑이가 제일 무섭나? 곶감인가요?”

고모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셨다. “호랑이보다도 곶감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으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바로 살림 사는 거란다.”

“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남자는 나가서 돈 벌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면 그만이지.”

정말 그랬다. 스물일곱 팔팔했던 내가 살림 사는 게 무서울 까닭이 없었다. 모교 병원에서 전공의 하던 중이라 월급은 비록 적었지만,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디딘 하룻강아지가 살림 무서운 것을 알 턱이 있나. 하지만 어르신들 말씀은 한 치도 틀림이 없어서, 이제 쉰을 넘긴 나는 하루하루 살림 사는 게 참 무섭구나 절감하는 중이다.

며칠 전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묵묵히 술잔만 비우던 한 친구가 피를 토하듯 말했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아니 열두 시간씩 일을 해도 어째 사는 게 희망이 보이질 않으냐. 게으름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한눈을 판 것도 아닌데, 사는 게 어쩜 이렇게 팍팍하고 힘든지 모르겠다. 모두들 일시에 묵직한 침묵에 빠졌고, 곧이어 맥없는 건배 잔을 부딪쳤지만, 말을 꺼낸 친구도 잔을 든 우리도 할 말은 없었다. 대체 무엇을 위하여 잔을 비울 것인가.

공자가 제나라로 가려고 태산 근처를 지날 때 일이다. 산중 깊은 곳에서 여인이 슬피 곡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유를 묻자 여인이 말하길, 호랑이가 시아버지를 잡아먹었는데, 얼마 전에는 지아비도 같은 경우를 당했고, 어제 다시 제 아들도 호랑이가 잡아갔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묻자, 여인이 대답했다. 여기에는 혹독한 세금이 없기 때문이지요. 공자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아라. 혹독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거란다. 가정맹호(苛政猛虎)의 고사가 나오는 예기, 단궁편의 이야기다.

애절양(哀絶陽)이란 노래도 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시다. 관부에서 동네 농부에게 이미 죽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군적에 올려놓고는 군포를 바치지 않는다고 농사짓던 소를 끌고 가 버렸다. 당시 노비 4~5인의 값이 소 한 마리와 같았으니 엄청난 재산이요,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폐농을 해야 할 판 아닌가. 온 가족이 몰살당할 처지에 놓여 악에 바친 농부가 군청 앞에 가서. 이 모든 것이 내가 남자인 탓이니 차라리 내 양물을 끊어내는 것만 못하다며, 낫으로 자기 양물을 끊어 손에 들고 군수를 만나 소를 돌려달라고 했다. 아내는 울부짖고 남자의 사추리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 기가 막힌 광경을 그린 시가 애절양이다. 다산이 책롱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지 2년째 되던 1803년의 일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혹독한 정치는 2000년 전의 일이고, 자기 양물을 끊어 버린 일은 20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법원에서 원직으로 복직시키라는 최종판결이 나왔건만, 현대차 정몽구는 들어줄 생각이 없어, 두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 추위에 40m 철탑 위에 올라가 농성 중인 세상이다. 그들이 하루 두 끼로 버티면서 절규하는 내용은, 제발 법대로 하라는 것뿐이다. 나는 묻는다. 재벌은 법 위의 존재들인가? 법을 지키겠다는 준법이 투쟁이 되는 이 나라는 2000년 전, 200년 전의 세상과 얼마나 다른가.

이런 혹독한 세상, 호랑이보다 곶감보다 더 무서운 정치는 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을 곱씹으며 길을 건너자, 저만치에서 유치원을 가는 아이들이 차에서 내려 선생님 뒤를 따라 일렬로 걷고 있었다. 그들이 맨 조그만 노란 가방이 병아리떼 종종종 입에 문 개나리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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