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량]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 오피니언
  • 사외칼럼

[박희량]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육단상]박희량 서산 운신초 교사

  • 승인 2012-11-06 14:11
  • 신문게재 2012-11-07 20면
  • 박희량 서산 운신초 교사박희량 서산 운신초 교사
▲ 박희량 서산 운신초 교사
▲ 박희량 서산 운신초 교사
녀석은 골치였다. 6학년이나 된 아이가 더하기 빼기가 안 되는 건 물론, 한글도 간신히 떼기만 한 터라 제 학년 공부는 아예 손도 못 댔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천성이 착하고 눈치가 빨라 가능성은 있겠다 싶어 은근히 정이 가는 아이였다. 교직경력 8년차, 이런저런 이유로 6학년 담임을 맡고 모든 열정을 바쳐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비장한 나에게 녀석은 막강한 적수였다.

“노력은 하는 거니?” 나머지 공부 시간이면 멍하니 서 있는 녀석이 늘 내 속을 긁어놓기 일쑤다. 늘 내 성의를 무색하게 하는 녀석이 정말 얄미웠다. 결국, 소리를 지르며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내 눈앞에는, 언제나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서 있는 녀석이 있었다.

“선생님이 애쓰는 거 안 보여?, 너도 성의는 보여야 하잖아?” 1년이 다 가도록 녀석과의 씨름은 이어졌고, 녀석을 꼭 변화시켜보겠다던 내 열정은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주면서 그럴싸한 변명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녀석은 결국 구구단도 다 못 외운 채 졸업을 하고 말았다. 나의 교직 경력에 커다란 흠집을 낸 것이다.

“선생님, 성민(가명)이가 학교도 그만두고 깡패들이랑 다닌대요.” 녀석을 보낸 지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이제 잊을만하다고 생각했던 녀석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뭔지 모를 죄책감, 책임감이 내 속에서 자꾸 꿈틀거렸다. 며칠을 고민하고 잠을 설치다가 녀석의 집을 찾아갔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그 집을 제 집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겁도 나고 돌아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작정 집안으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낯익은 한 녀석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내가 이 아이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면서….

“도대체 왜 그런 형들이랑 다니는 거야, 응?” 집으로 무작정 데리고 와서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을 괴롭힐 만큼 당찬 녀석도 머리 좋은 녀석도 아니지 않은가? 내 마음을 조금 알아줬는지 간신히 입을 연 녀석의 말이 나를 또 한 번 후려친다.

“저~ 선생님, 저 귀가 안 들려요. 그래서 학교는 가기 싫어요.” 녀석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녀석은 오래전 귀를 다쳤고 바쁜 엄마에게도, 공부만 가르치려는 엄한 선생님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이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순간 나머지 공부를 시켰던 그때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녀석이 안 들려서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짐작조차 못 했던 걸까. 온몸에 맥이 탁 풀렸고 녀석을 끌어안고 그만 엉엉 소리 내 울어버리고 말았다.

가출한 엄마 연락처를 모른다며 끝내 알려주지 않던 녀석은 못된 형들과는 다시 같이 다니지 않겠노라며, 다음 주에 나와 같이 병원에 가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날 저녁 남편과의 상의 끝에 녀석의 수술비를 마련해주자는 결론으로 못다 한 선생님으로서의 소임을 다해보고자 했지만, 1주일 뒤에도 한 달이 지난 뒤에도 녀석은 끝내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 후 녀석이 엄마에게 갔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가족과 함께 잘 지내리라는 생각에 위안이 된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켠 시커먼 멍으로 남아있는 녀석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도 나는 성민이를 닮은 아이들 때문에 맘고생을 하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멍 자국을 만들지 않으려고, 아이들의 눈빛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공부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면서 아이들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오늘도 교단을 오른다. 아이들이 바로 나의 선생님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취재]대전MBC 2024 한빛대상 시상식 현장을 찾아서
  2. 대전 신탄진동 고깃집에서 화재… 인명피해 없어(영상포함)
  3. aT, '가루쌀 가공식품' 할인대전 진행
  4. 국립농업박물관, 개관 678일 만에 100만 관람객 돌파
  5. 대전 재개발조합서 뇌물혐의 조합장과 시공사 임원 구속
  1. 농림부, 2025년 연구개발 사업 어떤 내용 담겼나
  2. 사회복지법인 신영복지재단 대덕구노인종합복지관, 저소득어르신에게 쌀 배분
  3. 제27회 농림축산식품 과학기술대상, 10월 28일 열린다
  4. 해외농업·산림자원 반입 활성화 법 본격 시행
  5. 농촌진흥청, 가을 배추·무 수급 안정화 지원

헤드라인 뉴스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충청권 소방 거점 역할을 하게 될 '119복합타운'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다. 충남소방본부는 24일 김태흠 지사와 김돈곤 청양군수, 주민 등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19복합타운 준공식을 개최했다. 119복합타운은 도 소방본부 산하 소방 기관 이전 및 시설 보강 필요성과 집중화를 통한 시너지를 위해 도비 582억 원 등 총 810억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위치는 청양군 비봉면 록평리 일원이며, 부지 면적은 38만 8789㎡이다. 건축물은 화재·구조·구급 훈련센터, 생활관 등 10개, 시설물은 3개로, 연면적은 1만 7042㎡이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