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은주 목원대 유아교육과 교수 |
어릴 적 두 살 위의 오빠와 겨울밤에 종종 하던 놀이가 있다. 솜이불을 방 중앙에 펴 두고 그것을 사각 링으로 하여 오빠와 내가 씨름을 하면 아버지께서 심판을 보셨다. 속내의 차림으로 마른 체격의 오빠와 내가 허리께를 잡고 흉내에 가까운 씨름을 하노라면 아버지는 나름 해설하듯 소리를 내시며 우리의 경기 흥을 돋우시곤 하셨다. 번번이 오빠의 승으로 끝났지만 이불 위에 퍼져 앉아서 숨을 할딱이면서도 깔깔거렸던 기억이 난다.
몇 해 전 20여명의 초등학생들을 인솔해 5박 6일의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일정기간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그 마무리로서 현장체험을 하는 취지의 여행이었다. 가기 전에 게임기, 만화책 등의 지참을 금한다고 하고 가정에도 협조를 구하였다. 그 이유는 이런 물품을 소지하면 오가는 길에 아이들이 각자 그것들을 손에 쥐고 몰입하면서 아이들 간의 소통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가 갈 때와 올 때 두 번 모두 연착이 되어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통행이 드문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에게 어느 시간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려야 함을 알려주었다. 내심 아이들이 지겨워하며 몸을 틀고 불평하면 어쩌나 염려도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아무 놀잇감도 없는 그 곳에서 몇 시간씩 아주 잘 놀았다.
바닥카펫의 무늬를 이용하여 '하늘땅'놀이를 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곰발바닥 소발바닥'놀이를 하는 무리, 유일하게 지참이 허용된 공깃돌을 가지고 카펫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무리 등, 어느 한 아이도 혼자 떨어져 있지 않고 모두가 신나게 놀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기존에 하던 놀이에 새로운 규칙이나 아이디어를 더해가며 놀이형태가 진화되기까지 하였다. 또 흥분하여 소리가 커지면 아이들 스스로 주변 사람들이 놀라니까 소리를 좀 줄이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솔 교사였던 나조차도 이 아이들과의 여행을 내가 지금까지 한 여행 가운데 가장 즐겁고 인상 깊은 것으로 꼽는다.
내가 지켜본 아이들은 정말 잘 논다. 유형(有形)의 놀잇감을 손에 쥐어주지 않아도 잘 논다. 필요하면 주변의 모든 것을 놀잇감으로 활용하는 안목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놀이를 할 때의 아이들은 매우 적극적이며 자발적이고 즐거워한다. 따라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한다. 그 놀이에 때론 부모가, 때론 또래나 손윗 아이들이 함께 한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 가운데 아이들은 틀에 박힌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정서적 포만감은 물론이고 놀이 규칙과 순서 지키기, 기억 및 연상하기, 때론 민첩성과 순발력 등 인지·신체적 학습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된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놀 시간이 없다. 아니면 “지금부터 30분 줄 테니 충분히 놀아”하는 놀이 시간표 속에서 놀아야 한다. 아이들이 자발적이고도 신나게 놀기 위해서는 이미 프로그램이 짜여진 컴퓨터 게임을 30분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게다가 평소 이런 놀이를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는 처음에, “어떻게 놀아요? 뭐하고 놀아요?”라고 놀이형태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참 안타깝다. 아이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감각기관을 손상당한 곤충과도 같다. 아마도 내가 지난 가을 밤 산책길에서 만난 그 아이들은 이 감각기관을 잘 계발하여서 세상을 주도적으로 탐색하며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로 자라고 있을 것이라 여기며 마음 한 구석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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