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과 걷지 않으려는 사람(필자).
불을 지르는 사람과 불을 끄는 사람(이준익 감독).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처용가의 다리 넷은 성(性)을 상징한다. 발은 그러므로 탄생이다. 주나라 시조 기(棄)의 탄생 설화는 이채롭다. 들판에서 정을 통하는 '야합(野合)'을 빙 돌려 표현했을 테지만, 어머니가 들판에서 거인 발자국을 밟고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 걷기란 생명을 탐지하는 길이다. '월화수목 대전달빛걷기대회' 33㎞ 구간을 완주한 소감이다. 1일 오후 6시 13분에 출발해 2일 오전 1시 30분에야 도착한 긴 여정이었다. 일생 평균 사람은 26년 4개월 2일을 잠잔다. 이렇게 걸으면 그 정도에 맞먹을 것 같다. '비와요. 행사 어떡하죠?' 걱정하는 메시지를 달래듯 한밭장례식장 뒤로 글래머러스한 달이 떴다. 아일랜드 고어로 달은 '글라므', 스코틀랜드의 달빛 요정이 '글람', 여기서 '글래머'가 탄생했다.
하기야 달은 이어폰으로 듣는 제이슨 므라즈의 '벨라 루나(달의 여신)'만으로 육감적이었다. 오 벨라 두 왓 유 두. 오 달의 여신이여 당신이 하시는 걸 하세요. 마음먹기 나름이다. 세상을 강자와 약자 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나눈 앨빈 토플러를 단 하루 잊는다. 걷는 게 일일 바에 고통스러운 일 라보르(labor)가 아닌 창조적인 일 오푸스(opus)라 여기니 발걸음도 수월하다.
발품 얘기를 하다가 올림픽이 생각났다. 한국 선수들이 사격, 펜싱, 양궁, 유도, 레슬링에 능한 것은 손바닥, 손가락을 맡는 장장근의 발달 덕이다. 태권도 종주국이면서 권투에, 축구로 메달을 따지만 야구에 소질이 있다. 농경민족이던 우리가 유목민족에 뒤처진 다리 족척근의 단련 방법도 걷기가 기본이다. 두런거리는 갑천 물소리, 유등천 노란 기생초의 흔들림, 대전천 쓰르라미로 숨어 있는 '시인'들과 만나는 마음공부는 옵션이다.
구름 때문에 일시 사라진 달빛이 오체투지 자세로 찾아든 건 평화원 장례식장 앞에서였다. 또 장례식장이다. 하지만 구름이 가린다고 달이 없는가. '신라의 달밤' 대회(66㎞) 출신 건각팀과 길동무하는 동안 마음엔 달이 둥두렷히 솟았다. 달빛과 메밀꽃이 일품인 봉평에서 대화 80리길, 하동포구 80리길, 사천의 서포 80리 벚꽃길이 이날은 안 부럽다. 우리네 삶과 사랑이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듯 월화수목 80리길 걷기도 그처럼 정성을 들여야 했다. toe는 발가락, toil은 수고하다, tolerance는 참음― 발의 수고를 견디는 걷기는 육체성과 정신성이 공존한다.
디지털 신인류 호모 디지쿠스, 스마트와 소셜 혁명이 만든 호모 모빌리언스, 아래로 처져가는 호모 드룹피어스가 오늘 다시 직립보행하는 호모 에렉투스임을 확인한다. 마음불황을 잊으며 약 4만7000 걸음의 발꿈치, 발바닥, 발끝 동작을 반복하며 온전히 '걷는 인간' 호모 워커스로 살았다. 건강코스(7㎞), 두리두리코스(22㎞), 월화수목코스(33㎞) 모두 온몸의 직설화법으로 얻는 진화의 길이었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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