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화시기 세번의 시장을 역임한 김보성 전 대전시장이 지난 17일 중구 문화동에 자리한 한밭도서관 대전시행정동우회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한밭이라 불리던 대전은 어떻게 인구 150만명의 광역 도시가 되었을까? 되돌아보면 대전에서 '배우자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고 말할 정도로 비만 오면 누더기 길에 불편을 겪거나 겨울엔 연탄을 마련하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을 때도 있었다. 너른 들판에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형성하는 산업화시기에 세번의 시장을 역임한 김보성 전 대전시장을 만났다. 세월은 그의 머리에 서리꽃을 피웠지만 그의 기억은 또렷했고 대전발전을 향한 고민도 여전히 진지했다. <편집자 주>
본보 창간 61주년을 맞아 대전 발전의 산증인을 찾아 특별인터뷰를 하기 위해 지난달 17일 중구 문화동에 자리한 한밭도서관 대전시행정동우회 집무실을 찾았다.
늘 부족한 도시 대전에서 6ㆍ25전쟁을 딛고 창간한 본보가 지나온 61년을 되돌아보기 위해 본보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보성 전 대전시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1974, 1978, 1995년 등 세번에 걸쳐 대전시장직을 수행하면서 당시 '무엇이든 부족했던 도시'에 근현대를 이끌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대전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대전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를 향해 달음질쳤다.
김 전 시장은 “한밭이라 불리던 대전은 산으로 둘러싸인 순 벌판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경부선의 대전역사가 만들어지면서 사람이 모이는 도시가 됐다”며 “당시 일본은 만주침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고 경부선을 서둘러 설치했고 공주에 있는 충남도청도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대전이 본격적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경부선은 당초 공주의 장기지역을 통과할 예정이었으나 대전을 경유하는 것으로 바뀌며 일본인이 모여들면서 도시의 틀을 갖추게 됐다”며 “대전은 한마디로 일제치하에서 일본사람들이 만든 도시”라고 말했다.
1905년 대전에 철도가 놓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 됐지만 성공적인 도시가 되려면 극복해야 할 게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근대화 시기 대전은 어떻게 성장해 왔을까.
당시 대전은 연료와 난방 등의 기본적인 생활기반이 모두 부족한 상태였으며, 겨울을 나기 위해 연탄을 확보하고 보릿고개를 넘길 곡식을 마련하는 게 행정의 중요한 업무중 하나였다.
-대전시장에 처음 부임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1974년 대전시장에 처음 취임하자마자 시작했던 게 화장장 건설사업이었죠. 당시 원동초등학교 학생이 숨졌는데 그의 부모가 대전에 화장장이 없어 청주에 갔다가 퇴짜를 맞고 수원까지 가서 몇 주를 기다린 끝에 자식을 화장하지 않았겠어요. 그리고 그 부모가 화장장을 찾아 전국을 헤매면서 전셋돈 10만원도 모두 날려 시청을 찾아와 하소연하는 데 가슴이 찡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대전에 화장장부터 마련해야 겠다 생각했죠.”
사실 그 때 당시 대전에는 화장장이 있었다. 1967년 폐쇄돼 사용하지 못했던 홍도동 화장장을 대신해 이듬해 동구 동면 신상리에 화장장 건물까지 지어놓고서도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운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후 김 전 시장이 1974년 부임하면서 정림동 현재 위치에 화장장을 계획하고, 사람이 이승에서 안고 있는 근심을 없애 준다는 의미에서 정수원(淨愁園)이라고 이름을 붙여 화장장을 건설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나온 61년 중도일보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중도일보 창간 멤버중 내 친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1970년대 당시 정부의 '1도 1사'의 언론통폐합 정책때문에 대전일보와 합치는 문제에 부닥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내가 시장일 때 일은 아니었지만, 대전일보의 당시 국장이 자기 동창생을 내세워 중도일보를 인수하는 것으로 했죠. 중도일보가 대전일보에 제호를 팔려고 한 게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중도일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고 충남일보로 통합됐죠.”
김 전 시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중도일보를 창간한 고(故) 이웅렬 회장에 대해 회상했다.
“고인인 이 회장은 당시 대전개발위원회를 앞장서 만들고 (박정희)대통령이 대전으로 내려와 좌담회를 하면 제일 먼저 연사로 나섰습니다. 지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한마디로 대단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김 전 시장과의 대화는 60년의 세월을 오르내리며 대전의 옛모습과 발전을 위한 진지한 내용들을 이어갔다. 일본사람이 만들어 놓은 군사 도시 대전. 지금은 대전시민의 휴식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서대전 시민공원의 과거 모습은 어땠을까.
서대전 일원은 서울의 용산처럼 일제 강점시대 때부터 일본 육군의 연병장과 군부학교 등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대전 네거리 역시 당시에는 삼거리였다. 당연히 군대는 도시의 팽창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했고, 주민생활에 최대 불편사항이기도 했다.
“1974년 대전시장에 부임하고서는 서대전 삼거리를 네거리로 만들고 공원부지로 지정하는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중앙도시계획의 공원부지 확정 고시 전에 2만9752㎡를 민간에 매각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도시계획 권한은 시장에게 있었고 그래서 제가 연병장과 사격장이 있던 곳을 공원으로 지정해 버렸죠.(웃음) 이게 지금의 서대전시민공원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시 재정 여건으로 시내에 공원이 생긴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전국에서 백내장 무료시술을 처음 시행하신 걸로 압니다.
“맞아요. 제가 전국 최초로 백내장 무료시술을 시 차원에서 시행했죠. 뿐만 아닙니다. 출산을 앞둔 열악한 가정의 산모 출산을 돕고자 시립조산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날 인터뷰 전까지 김 전 시장은 폐렴증상으로 병원을 오갔다.
하지만 세번에 걸친 대전시장 재임과 본보의 지나온 61년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김 전 시장은 힘있게 대화를 이어갔고 앉은 자세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했다. 김보성 전 시장은 현재 대전시행정동우회 회장과 함께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자문위원과 충청권 광역경제발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세종시와 대전의 관계맺기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세종시가 출범했습니다. 앞으로 대전과 세종시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요.
“세종시는 대전과 20분 내 최근 거리에 있어 상호보완 협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테면 세종시에 대학이 들어설 것이고 거기에 앞서 대전에서 먼저 지역 대학을 보내 학문교류의 첫단추를 꿰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대전도시철도 2호선을 연계하는 등 10분대 생활권으로 상호보완적으로 과학도시와 중앙 행정도시가 어깨동무 속에 발전을 기해야 합니다.”
-세종시 출범에 따른 대전발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죠.
“대전발전은 세종시와 같은 생활권이므로 대전도시철도를 오송역과 조치원역, 대전역을 연계한 순환도시철도를 건설하는 방안과 충남 서해안(보령, 서산, 당진)과 청주공항 및 동해안과 연계한 내륙횡단과 순환고속도로를 건설해 사통팔달 교통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항상 각종 국책사업에서 충청권 홀대론이 심합니다.
“국회의장과 부의장이 지역 출신인 상황인 만큼 그동안의 충청권 홀대론을 딛고 대전, 나아가 충청권 발전으로 비약하는 시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김 전 시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봉사'와 '양보'를 강조했다.
“소통에 너도나도 노력하고는 있으나, 모두가 자기중심적 의견을 앞세우고 있어 소통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통은 본인 의견을 내세우지 말고 양보하고 봉사할 때 원활히 이뤄질 것입니다.”
김 전 시장은 이어 “12월이면 대통령선거가 있는데 지금의 정치인들은 조변석개(朝變夕改)식의 언행으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민주국가의 기본 정신을 초지일관적 신조를 지니고 있으며, 남북통일의 올바른 혜안을 가진 분이 대통령에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담=이승규 사회부장(부국장)
정리=임병안ㆍ사진=김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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