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로돌프 R. 이나스는 1934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나 1965년 호주국립대학 존 에클스(John Eccles)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대학교 의대 생리학 및 신경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으며, 지금까지 400편이 넘는 과학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오징어의 거대 시냅스와 인간의 자기뇌전도(MEG)를 이용해 하올리브 및 소뇌와 시상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유명하다. 미항공우주국(NASA) 산하 뉴로랩(Neurolab) 과학연구단의 단장이기도 하다.
마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서 가장 적당한 것은 무엇일까. 최근의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에서는 마음은 신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마음이 신체화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정신활동을 위해서는 '뇌'가 필요하며, 뇌를 형성시킨 신체가 부수적으로 필요로 함을 말한다. 몸과 두뇌에 제약받지 않는 정신, 순수하고도 자유로운 영혼이란 없다는 것이다.
몸에서 자유로운 정신이란 없다는 이 주장은 매우 도전적이다. 말 그대로라면 고상하다고 배웠었던 이성의 세계에 균열을 내야 한다. 철학과 종교의 역사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다. 몇 가지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육체와 영혼사이의 긴장과 괴리는 인간성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건가? 육체적 본성에서 원죄의 씨앗을 보았던 어거스틴이 틀린건가? 이승에서의 육신의 종말은 영혼도 함께 끝나는 것임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접근이 어렵기도 했을 뿐더러 결론을 유보했던 질문이다. 질문을 한 켠에 품고 꿈꾸는 기계의 진화를 차분히 다시 읽었다. 저자의 글에 정신이 번쩍든다. 그의 차분한 설명과 절제된 문장에 탄복하며 책을 한권 넘기니 '우아한 이성'의 세계가 따뜻한 심장근처로 내려온 듯한 느낌이다. '이성이여 정신차리고 천상의 세계에서 내려오라'는 손짓에 내 머리 속 마음을 움직였다. 물론 어려운 몇 가지 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 이지만, 하나는 확실해졌다.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해답을 찾아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활동은 진화발달단계인 호모사피엔스에 이르러서 갑작스레 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의 출현과 함께 시작됐으며, 몸의 감각과 운동능력의 향상과 함께 발전 돼 왔다. 보고, 듣고, 깜짝 놀라 도망가는 신체의 반응과정은 마음의 중간과정이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의 말초신경계가 보내는 신호에 의지해 살아가는 작은 동물은 마음이 없는 천한 미물이 아니었다. 그들의 감각과 움직임은 전기적 회로로서 뇌 안에 유전되고 축적되어 '마음'을 숙성시켜 나갔다. 감각을 유발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감정이라는 증폭단계를 거쳐 운동을 유발했다. 운동은 내면화 됐고, 신경회로로서 축적됐고, 그것이 정신활동을 유발하게 됐다. 환경은 감각을 통해 내부로 들어오고 운동을 통해 내면화 됐다. 그리하여 인간은 700의 질량과 14의 어두침침한 전력으로 자기 존재의 근원과 전체를 돌아보는 '마음'을 누리게 됐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자유롭지 않다. 인간의 가능한 개념체계들과 가능한 이성형태들은 몸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라는 추상적 실체는 세상에 홀로 사는 유아론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방식이 바로 외부 세계의 성질을 내면화 화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생명을 둘러싼 생명의 연대성이 더욱 공고해진다. 그간의 생태학적 관점은 인간이 그를 둘러싼 물질 순환적 환경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생태계의 일원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환경과 소통하고 순환하는 몸의 물질대사를 넘어서 '마음'도 그 안에서 태동하고 형성되어 왔으니까.
머리로는 이렇게 이해해도 한편으로 기분상한 것은 있다. 마음이 탐ㆍ진ㆍ치의 유혹에 항상 놀아나는 몸뚱이에서 비롯된다니 그렇다.
그래서 할머니가 생전에 늘상 하시던 말씀,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챙기면 된다”는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정신을 놓으면 몸뚱이가 호랑이 밥이 되는 건 분명하다. 정신이 살아야 몸이 산다. 정신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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