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봉한 대전대 경찰학과 교수 |
지난 18일 의정부 전철역 구내에서 발생한 칼부림 사건, 20일 서울 광진구 주부살인사건, 21일 수원의 흉기난동사건, 같은 날 울산의 슈퍼마켓 여주인 상해사건, 22일 여의도 한복판의 칼부림사건이 불러온 정신적 충격에 사회가 갈피를 잡으려고 애쓰는 형국이다.
사회는 어떤 강력범죄의 발생이 조직범죄자나 전과자에 의한 것이 아닐 때 또는 특정한 동기가 보이지 않을 때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데다 이번과 같이 연이어 터지는 현상에 더욱 당혹해 한다.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짧은 시간대에 장마철 폭우마냥 쏟아질 수 있는가? 이 중 묻지마 범죄라고 볼 만한 사건들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칼부림의 어떤 측면이 피해자를 다수로 만드는가?
끔찍한 범죄 후에도 태연해하는 광진구 강간미수 살인범에게 “고통스럽게 죽으라고 말하고 싶다”는 피해자 가족의 복받친 표현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피해자의 심정을 담고 있다. 선량한 시민들이 강력한 대응과 중형을 부르짖는 것 또한 공감이 간다.
이러한 강력범죄에 대해서는 '범죄자=야수'로 접근한 듯한 해결책이 있다. 위험한 짐승들은 감시와 경고를 통해 안전을 유지하고, 고위험군 짐승들은 최대한 격리시켜 두거나 아예 목숨을 끊어 문제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형사사법제도에 대입하면 전자발찌, 감금, 사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들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묻지마 범죄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최근의 묻지마 범죄의 원인을 한가지로만 설명할 수 있다면 대책수립이 명쾌하고 용이해질 것이다. 하지만 범죄현상은 여러 손가락을 이용해 물건을 집는 것처럼 다중원인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신중한 접근이다.
범죄학 역사를 돌아보면 선조들은 범죄자를 '썩은 사과'로 여겨 골라내거나 '병자'로 보아 치료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이들을 드러내서 엄한 처벌을 하면 다른 잠재적 범죄자들이 범행을 포기할 거라는 신념을 굳게 지켜왔다. 이러한 견해나 정책이 일부분 타당하지만, 범죄는 개인의 생물학적 차원보다 더 복합적인 사회적, 심리적 요인이 얽혀 있다는 점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묻지마 범죄의 배경에는 정보화 사회가 놓여있다. 언론의 대대적 보도가 모방을 낳고 매스컴을 자신의 심정이나 비뚤어진 분노를 호소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또한 타인에 무관심한 도시화는 고립된 '코너맨'들이 불특정다수에 대해 심리적 저항 없이 범행을 저지르는 데 일조를 한다. 칼부림 사건의 피해자가 다수인 것은 일단 피를 보게 되면 술 취하듯 제2, 3의 범행으로 진행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두 번째부터는 기억이 안난다'는 범인의 진술이 거짓이 아닐 수 있다.
최근 사회구조가 자포자기, 수치심, 무력감에 빠진 재범자나 낙오자들을 세차게 몰아붙여 사실상 자살결심을 유도하거나 화풀이범죄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된다.
자살은 범죄예방측면에서도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살은 종종 가족동반자살과 같이 '확대자살'로 이어지거나 묻지마 범죄와 같이 자살에 앞서 타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과 타살은 공격성이 향해지는 대상에 따라 구분될 뿐 표리일체의 표상이며 자살결심이 타살로 전화(轉化)되기도 한다. 화풀이범죄는 복수하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강력범죄보다 더 많은 피해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공동체 정신에 기초한 합리적인 사회안전망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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