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바로 옆은 공장. 아버지는 일손이 부족하면 고향사람을 불러다 썼다. 자연스레 충남 서천군 연건동 지회 같은 분위기였다. 공장이 서울의 망월리. 선소부락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원체 과묵하신 아버지. 말씀 없으셨다. 반응이야 있으셨다. 그건 얼굴 전체로 번지는 조용한 웃음. 순백의 미소. 일품이었다. 멋지다는 생각 많이도 했다.
그런 분이 어느 날 저 앞에 같이 가자 하셨다. 중학교 2학년 때다. 간 곳이 어디였는가. 그만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효제 역도 체육관. 관장과는 미리 얘기가 된 듯 했다. 병약한 건 아니었다. 병 별로 걸리지 않고 자랐다. 그런데 공장사람들이 맨 날 공부만 하면 되겠냐. 운동도 좀 시켜라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심하시고 데려간 터였다.
본디 즐기지 않는 운동. 계속할 의지 있을 리 없다. 아버지 체면 생각해 체육관 개근상만은 타기로 작심. 가기는 가되 농땡이 부린다. 드는 시늉 조금 한다. 이내 벤치에서 쉰다. 관원이라야 서너 명. 관장은 많은 시간을 나한테 할애한다. 더 죽을 지경이다. 갈수록 흥미 잃었다. 관장도 드디어 이해했는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며 오지 않아도 된다 했다. 이 역도 체육관 다니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시적으로 원했던 첫 번째 희망이었다. 무산된 다음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 나도 뭐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이나 느낌은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두 번째 희망사항은 무엇이었나. 대학진학 때 학과 선택이었다. 법과대학을 원하셨다. 아들은 고집 부렸다. 거긴 안가겠다고 저항했다. 문리과대학으로 원서 썼다.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시험 보던 날 아버지가 동숭동 문리대교정에 계셨다. 창 너머로 아들 바라보시던 그 눈. 걱정과 기대가 반반? 그 모습을 어찌 잊겠는가.
중학교 시험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어머니가 상의하여 원서 낼 학교를 정했다. 입학시험 치러 갈 때는 아버지가 나섰다. 아버지는 출발 전에 신경안정제를 먹이셨다.
이화동 집에서 신문로 학교까지는 택시를 태우셨다. 상상해 보시라. 1959년에 택시를 타다니. 이건 얼마나 큰 지출이었겠는가. 그리고는 교문 밖에서 시험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시험 끝나고 종로통 그 유명한 중국집 갔다. 짜장면 먹이셨다. 까칠한 입에 짜장면만한 게 있겠느냐 하셨다. 아들 손 이끄셨다. 그런 분이셨다. 아들의 전쟁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 때는 영 달랐다. 머리 커졌다고 건방떨었다. 내 인생 내가 결정한다? 아버지를 내 인생에서 조금 소외시켰다. 결단코 아버지와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몇 년 지나 육군 입대. 제대 석 달 앞두고 아버지가 병 나셨다. 뇌졸중. 한 달을 병상 지켰다. 내내 의식불명. 스물 네 살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려고 했다.
아버지 옆에서 수없이 되뇌고 되뇌었다. 아버지! 나, 정말 아버지 좋아했습니다! 정말 좋아했습니다. 외치기도 했지만 과연 들으셨는지? 들으셨으리라 믿고 산다.
해마다 한 여름이면 아버지 기억해낸다. 줄곧 병상에 누워계셨던 아버지 회상하곤 한다. 이럴 즈음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명에 잃은 여성의 출전소식 듣는다. 박근혜 후보다. 박근혜 후보에게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계신다. 나는 그 분 시대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아직도 굶주리는 나라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폄하하는 세력이 의외로 많다. 박근혜 후보에게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짐이 되고 말았다. 딸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념과 치적을 평가하고 정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후보의 대선은 아버지와의 전쟁이다. 회피하면 패배. 풀고 가면 승리. 딸의 대선승리는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기회이기도 하다. 역사의 물음에 답 쓰는 때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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