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시작은 사소한 아이들의 싸움이다. 한 아이의 얼굴에 싸움의 흔적이 남았다거나 울면서 부모에게 억울함을 호소한다거나 혹은 싸움 도중 엄마가 제 아이의 편을 든다면 십중팔구 어른들의 싸움이 되고 만다. '대학살의 신'도 시작은 아이들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대학살 극으로 번졌느냐고? 천만에.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보다 웃기는 어른들의 싸움을 그린 코미디다.
앨런(크리스토프 왈츠)-낸시(케이트 윈슬렛) 부부와 마이클(존 C 라일리)-페넬로페(조디 포스터) 부부는 아이들의 싸움 때문에 만난다. 교양 있는 사람들답게 간단히 문서로 정리해서 조용히 끝낼 일이었다. 그런데. “재커리 코윈은 브루클린 공원에서 막대기로 '무장'한 채 이턴 롱스트리트의 얼굴을 쳤다.” “잠시만요. '무장'이라니요. 그냥 '가지고' 정도가 맞지 않나요?” 가벼운 시비와 딴죽. 짜증이 슬슬 밀려오면서 속에 들어찬 더러운 본성이 맞대응하기 시작한다.
볼썽사나운 말과 행동이 툭툭 튀어나온다. 점점 말꼬리 잡기, 비꼬기, 지난 얘기 또 꺼내 시비 걸기 등 유치한 말싸움으로 번지고 급기야 육탄전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나중에는 부부고 뭐고 없다. 각개전투에 돌입한 이들의 좌충우돌은 18년 산 스카치의 술기운까지 가세하면서 투견판의 개들처럼 서로를 물고 뜯으며 막장으로 치닫는다.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지만 '척하는 인간'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과정이 유쾌 통쾌하다. 올바른 척, 교양 있는 척, 잘난 척하는 인간들을 예리하고 꼬집고 그들이 차려 쓴 가면마저 모조리 벗겨버린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2년 전 가택연금에 처해진 동안 야스미나 레자와 함께 그녀의 동명 연극을 시나리오로 옮겼다. 국내 무대에도 올라 대한민국연극대상, 연출상, 여우주연상,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 등 권위 있는 시상식을 '올 킬'한 이 코미디를 실내극의 대가 폴란스키는 영화적 장치를 활용해 맛을 더했다. 카메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양한 장면들을 만들어냈고 인물의 과감한 배치는 불편한 상황의 맛을 한층 돋운다. 연극에서 화제가 됐던 '구토'신은 영화에서 더 확장됐다.
영화의 주연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대사들이지만, 이 '고품격 막장' 싸움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명배우들의 연기다. 케이트 윈슬렛의 진상 연기, 크리스토프 왈츠의 냉소적이며 소심한 모습, 독설을 퍼붓는 조디 포스터와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면서도 결정적 순간 냉정하게 돌변하는 라일리의 비정한 연기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대전아트시네마 상영중.
안순택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