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지사 이일남 옹이 수여받은 훈장을 들고 독립운동 당시를 떠올리고 있다. |
88살의 고령에도 지난 세월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애국지사 이일남 옹. 이일남 옹은 광복절을 앞두고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치욕의 역사와 광복의 의미가 젊은 세대에게 잊혀져 가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 옹에게 이날 가장 먼저 해방 당시의 감회를 묻자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옹은 당시 전주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을 7개월 앞두고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옹은 조국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이 옹은 어린 나이로 항일학생결사 조직인 '우리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주사범에 다니던 이 옹은 조회때마다 조선인을 멸시하는 교장의 발언과 학생들을 일본군의 사병으로 육성하려는 병영화에 저항하고자 했다. 또 국토 유린과 창씨 개명, 정신대 등 일제의 참담한 행위를 저지해야한다고 여겼다.
뜻을 같이 했던 학우 16명이 '우리회'를 조직했다. 학교의 병영화와 조선인을 노예로 취급하는 각종 정책에 맞서 조국의 독립에 일익하고자 만들어진 학생들의 결사체였다.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을 당시 이 옹은 일본 헌병과 순사들의 고문과 각종 협박으로 몸이 쇠약해진 가운데 장티푸스를 3차례나 앓고 난 뒤라 겨우 숨만 붙은 상태였다.
광복절 당일, 그런 그를 학교 선배가 들쳐 업고 고향인 금산까지 데려다줬다. 사흘 후 제정신을 차린 뒤에야 거동이 가능해진 하지만 일제의 탄압 앞에 학생 결사체의 활동은 여의치 않았다.
우리회 일원들은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고 역할을 나눠 맡았다. 이 옹은 국내에서의 자금책이자 국내의 상황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런 활동이 일본 순사들에게 적발되면서 이 옹은 모진 옥고를 치렀다. 이 옹이 끌려간 뒤 갓 막내동생을 출산했던 모친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옹은 “지금의 조국은 민족의 얼을 살리고 민족의 나라를 곧게 세우고자 일제에 항거하고 모진 고문을 겪은 선열들의 희생 위에 선 것”이라며 “광복절은 단순히 성과를 자축하는 날이 아닌 숭고한 희생과 그들의 넋을 기리는 중요한 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조국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친구, 선후배들이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애국활동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강우성 기자 khaih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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