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가 흥미로운 건 행간 사이사이 물음표가 널려있기 때문이다. 왜 그랬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는 건 아는 사람은 아는 즐거움인데, 근사한 상상은 역사추리 또는 팩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세종대왕과 관련한 역사에서 물음표 두 개를 가져온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심약했던 충녕대군은 도대체 어떻게 성군이 될 수 있었을까. 세종은 세자에 책봉된 지 단 '석 달' 만에 왕위에 오른다.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태종대왕은 그렇게 급하게 왕위를 물려준 걸까. 장규성 감독은 비밀의 열쇠가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석 달'에 있을 거라고 추리한다. 그는 충녕이 민초의 삶을 돌아본 어떤 계기가 있었으며 백성과 아픔을 같이 하면서 진정한 군주의 자세를 각성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의 장기인 코미디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자는 궁궐담을 넘어 거지 행색으로 백성들과 어울리고 그 사이 궁궐에선 세자와 똑 닮은 거지가 세자 노릇을 했다고 넉살을 피우는 것. 물론 대선을 앞두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지도자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재미는 상식을 깨부수는 캐릭터들에게서 나온다. 불뚝대는 성질에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태종(박영규), 양반집 곳간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황희(백윤식), 질투에 눈이 멀어 물불 가리지 않는 세자빈(이미도), 갑자기 닥친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충녕의 호위무사 해구(임원희) 등 기발한 캐릭터의 향연이다.
특히 세자빈을 연기한 이미도는 성질부리는 코믹 연기로 등장하는 장면마다 폭소를 유발한다. 올해 상반기 우리 영화가 발견한 '발견급 스타'가 '건축학 개론'의 '납뜩이' 조정석이었다면, 하반기 발견은 이미도가 될 듯하다.
물론 충녕대군과 노비 덕칠을 1인 2역으로 연기한 주지훈도 발견급이다. 드라마 '궁'과 '마왕'에서 서늘하고 날선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의 이미지였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살갑게 망가진다. 엘리트 세자의 면모에서 천한 신분인 덕칠까지 소화해야 하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꽤 넓었음에도 마치 두 명의 배우를 보듯 깔끔하게 소화해냈다. 흥행 결과를 떠나 그의 연기에 대한 평단의 점수는 꽤 후할 듯.
문제는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재기발랄하게 그리며 유쾌하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후반부로 가면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나라를 통치하려 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그리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진중해지는 모드는 좀 생뚱맞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이래야 한다는 것까지 웃음으로 풀 수는 없었을까. 비리를 저지른 측근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뭐 그런….
안순택 기자 sootak@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