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금산문화원장 |
봄 가뭄에 '비가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던 적이 불과 달포 전이다. 비가 너무 와서 '이제 그만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던 날도 며칠 전이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이제는 '비라도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할 정도로 덥다. 습도까지 높아 불쾌지수가 최고로 치솟았다는 일기예보를 몸으로 실감할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씨다. 올림픽 메달 딴 선수들의 무용담만이 더위를 잊게 해주는 청량제일 뿐이다. 이런 날에는 평소에 통용되던 얘기들도 시비 거리가 되고 웃으면서 할 얘기도 싸움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곈데요. 일 오후 시에 에서 회의가 있는데 참석할 수 있으시죠?”
언제나 받아오던 평범한 전화를 받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갑자기 짜증이 났다. 첫째는 물론 더운 날씨 탓이다.
둘째, 전화 건 사람의 매너에 대한 불만이다. 전화 대화는 -물론 편리한 점이 훨씬 더 많기는 하지만- 직접 만나 하는 대화와 다른 몇 가지 제약이 있다.
전화기 너머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르고 하는 대화가 많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얼굴을 보며 대화하면 표정이나 몸짓에서 상대방의 기분과 상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전화로는 오직 목소리만 갖고 상대의 감정을 짐작해야 하는 것도 어려움이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오해도 잘 풀리고 큰소리 낼 것도 자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지만 전화로는 감정이 바로 튀어나와 버리기 쉽다.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다 보면 아무래도 자제력이 더 커지지만 전화대화의 상대는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정 조절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로 목청 높여 싸우는 장면을 길거리에서 종종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지금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기 이름 정도는 얘기했어야 한다.
그리고 관공서에서 내 시간을 한두 시간 빌리겠다는 의도로 전화를 한 것이라면 조금 더 친절하다는 느낌을 내가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한다.
그 계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는 법원, 검찰청에도, 그리고 경찰서에도 그렇게 전화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힘이 셀수록 더 조심하는 것을 보니 민주주의가 생활화 돼가는 징조가 아닌가 싶다. 아마도 당사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무척 억울할 것 같다. '내가 뭘 어쨌다고…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반말을 한 것도 아닌데 별 것도 아닌 일로 웬 호들갑인가?' 하는 마음도 클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에 불쾌감을 느꼈다. 무심코 모르고 한 말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면 이 기회에 인식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 느끼는 불쾌감을 극복한다면 오히려 약이 될지도 모른다. 한때 잠깐 불쾌했던 경험이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약이 되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그동안 다른 사람을 전화로 불쾌하게 만든 적은 없었던가?' 대답은 '물론 있었지요. 그것도 여러 번 있었지요. 까맣게 잊고 살았을 뿐입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요즘과 같이 불쾌지수가 높은 날에는 모름지기 만사 조심할 일이다. 내 기분만 불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바꾸면 '며칠 지내보니 더위도 참을 만하네' 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나도 스스로 반성하고 나니 견디기 힘들던 무더위가 갑자기 한결 시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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