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꼴 이미지를 쓰는 제약회사에서 전시회를 했다. 부채가 주제인 내용보다 '여름생색전'이라는 발칙한 타이틀에 왠지 끌렸다.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체면'이 '생색(生色)'이다. 알아주기만 바라는 생색, 한 일도 없이 부리는 헛생색이 고약하지, 면목이 서는 생색이야 나쁘지 않다.
생색에도 겹이 있다. 세상사가 좋고 나쁨 두 겹이고 '부채질'도 두 겹이다. 안 좋은 상태를 부추길 때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한다. 문화적 관습에 의한 부채질의 의미망(網)은 살아남았다. 절멸 위기인 것도 있다. 버림받은 여인의 상징인 '가을부채', '추선(秋扇)'의 경우다. 한 철 애지중지하다 서늘하면 잊히는 가을부채. 정답게 포개 겹을 이루던 임이 거들떠보지 않는 처량한 운명이 싫다.
한시에서 '난간에 기대다'의 의미망은 기다림에 지쳤다는 뜻이다. 조선 시인 옥봉은 아예 '화장 못 지우고 홀로 난간에 기대'라고 했다. 아쉬운 이별을 두고 '버들가지 꺾는다'고 한다. 버들[柳]은 여인의 상징이다. 아름다운 허리(유요), 눈썹(유지), 모습(유용), 교태(유태)가 그렇다. 중국의 '파교'에서 그랬듯이 버드내다리 어느 난간에서 버들을 꺾어 이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버들이 쑥쑥 자라듯 내 청춘도 속없이 흐르니 속히 돌아오라! 가을부채 만들지 말고!
겨울부채도 한가지다. 여름난로와 겨울부채라는 '하로동선(夏爐冬扇)'은 노무현, 이철, 김원웅, 원혜영 등 정치인들이 동업했던 식당 이름으로 유명하다. 그때 한 노부부가 “정치하듯 식당을 하면 망할 것이고, 식당을 하듯 정치하면 성공할 것”이라 조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화로, 부채는 제철에 맞게 이듬해 겨울과 여름을 기약할 수는 있다.
떠난 임은 그러나 기약이 어렵다. 문화의 액세서리 지위를 빼앗긴 부채의 운명도 비슷하다. 일부 교육지원청과 동사무소 등에서 부채를 선물했다고 뉴스가 된다. 임금에서 서민까지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던 당대의 뉴스는 역사가 됐다. 조선 사신의 부채와 청심환이면 중국에서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는 『열하일기』 박지원의 전언도 뉴스였으나 역사다. 이제는 중국산 부채가 시장 한 구석을 차지한다.
그보다 마뜩찮은 건 다른 데 있다. '홍보'에 따르면 에어컨 설정온도를 3도(25→28도) 올리면 발전소 2개를 안 지어도 된단다. 전력사용량은 그럼 고정불변인가. 발전 효율은 낮고 정전 사태가 무서우면서 무슨 '효과'만 내세운다. 절약은 좋으나 '28청춘 ○○○청(廳)' 표어도 '마음 비우니 불볕도 서늘하구나'처럼 억지스럽고 어설프다. 계백장군 결사대처럼 더위와 결사항전하느니 '1인 1부채 갖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더 합리적인 일이다. '가을부채'처럼 시세 없어 보편성을 잃기 전에 말이다.
화장도 안 지우고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이 이럴까? 사람들은 가을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장소가 누각 난간, 아파트 창가, 카페 테라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부채질'의 문화적 의미망은 당분간 안 잊힐 것 같다. 공천헌금이니 뭐니 해서 냉소와 불신을 부채질하는 정치권이, 입은 꿀인데 뱃속엔 칼을 품은 정치가 더위를 부채질한다. 언제쯤 여야가 겹을 이뤄 국민 가슴에 시원한 부채 한 자루씩 안겨줄 날이 있을지. 내일(7일)이 입추이자 말복이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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