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중도일보 전 주필 |
이상(李箱)은 이 풍성한 녹음 천지를 독하게 매도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지구의 표피가 하도 엉성해서 한꺼번에 녹색화 해버렸다고…. 반면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섭은 이 무렵 산림 속에 들어가 수목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의 몸속에도 송진이 흐르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두 귀재의 말은 어느 쪽이 정답인가? 우리는 편한 대로 자연주의든 다다이즘(dadaism)이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아낙네들이 전쟁이야기를 제일 싫어한다지만 오늘 만은 양해를 바란다.
필자는 6ㆍ25전쟁 때 휴전을 김화(金化)에서 맞았지만 실은 제주도에 있는 하사관학교 조교로 남아야 할 몸이었다. 졸업 날짜가 다가오자 하사관학교에 남아 있을 것을 조교가 설득하고, 중대장도 권유했다. 당시 조교와 중대장은 기백은 좋으나 일선에 가면 대부분 소모품으로 전사한다는 것이다.
필자를 붙잡는 이유는 입교와 졸업점수가 수위라 해서 조교로 붙들어 둘 속셈이었겠지만 필자의 전장 일선행 주장에 중대장은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아직 맛을 모르는군. 일선 분대장으로 가면 대부분 소모품이 된다”고 설득했지만 필자는 완강하게 맞섰다.
그 까닭은 이랬다. 나의 건강이 일선에 가기 전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몇 달째 설사를 계속하고 훈련 중에 오물이 수시로 가랑이에 흘렀다. 일상 훈련은 해병대를 넘어섰다. 한 겨울 아침 동이 트기 전 돌로 얼음을 깨고 알몸으로 강물에 뛰어들게 했다. 조금만 주저하면 머리 위로 총탄이 '핑핑' 날아들었다. 얼음을 깨고 강물에 뛰어들면 깨진 얼음덩이가 앞가슴을 칼로 에이는 듯하고 그렇게 강물속을 헤매다 나오면 머리가 핑 돌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훈련은 그 뿐만 아니다. 한라산 등산길을 맨발로 행군하다 보면 눈 덮인 통행로에는 피가 흔근하다.
제주도를 마다하고 필자가 제일 먼저 전방에 도착한 곳은 철원이었다. 중대본부가 저 유명한 '도피안사', 그 다음은 철원. 개활지에 포진했다가 백마산 전투를 치렀다. 백마산은 철원, 김화, 평강, 원산으로 통하는 요지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중공군 군단 병력과 인민군 병력이 아군과 맞붙어 격전을 벌였다. 산 높이가 2m 줄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해 나에게 조그마한 행운이 찾아왔다. 백마산 전투 때 수색 나갔다가 숲속에서 기어가는 중공군을 덮쳐 포로를 잡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지금 살림집 정문에는 '국가유공자의 집'이란 팻말이 붙고 다달이 얼마간의 병원비가 나온다.
김화 전투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옆 부대 수도 사단 부사단장(포병사령관)이 전사했다는 소문이었다. 신문에도 '장렬한 전사' 등의 표제로 장식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내용은 벙커에서 참모회의를 하던 중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방망이 수류탄이 터지자 모두 손을 들었는데 사령관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중 소위 한 사람이 운 좋게 데스크 밑으로 숨었다가 살아났다.
당시 장렬하게 전사했다던 포병사령관은 휴전 후 포로교환 때 살아왔다. 전쟁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적의 군함 두 척을 격침하고 5척을 격침했다고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공통점이다.
특히 태평양전쟁 때 일본은 더 심했다. 일본이 손을 들고 맥아더와 일본 측이 전후 보상을 논할 때 맥아더는 말했다. “그 액면을 일본의 신문방송이 떠들어댄 수치가 있지 않소! 그대로만 보상하시오.”
이 말에 일본 측이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휴전 일을 앞두고 고향생각을 한다. 사변 당시 나와 한날 한시에 군에 갔던 권 군. 훈련소 시절 화장실을 가도 떨어져선 안 된다고 화장실 문을 지키던 친구.
그는 휴전하던 해 속초에서 전사했다. 오랜 세월 나는 그의 가족 앞에서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살아있다는 미안함에서….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고향의 그 부모형제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젠 고향엘 가도 아는 얼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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