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숟가락 정치는 있을 수 없다."
'숟가락'은 계량의 기준만이 아니라 형편이나 생사의 갈림이 되기도 한다. 쏠쏠히 살 만한 경제력을 두고 '밥술이나 뜬다'고 말한다. 이승과 절연하는 죽음을 '밥숟가락을 놓는다'고 하는데, 독일에서도 '숟가락을 내주었다'가 '죽었다'의 의미로 속담처럼 쓰인다. 먹새가 많고 적음을 떠나 밥 먹는 일도 일이다. 더 막막하고 고달픈 일은 직장 없이 놀고먹는 일이다.
숟가락의 은유는 그 안에 명징성, 깊이를 담을수록 폭이 달라진다. 젊은 여성의 숟가락 목걸이는 묘한 기분에 잠기게 하고, 저승까지 지니고 간 숟가락 부장품, 푸른 녹이 슨 밥숟가락 유물은 마음에 고압전류가 흐르게 한다. 일본 에도시대부터 썼다는 나무젓가락에서는 신라의 청동제 숟가락에서와 같은 감동의 결이 일지 않는다. 100년 전 침몰한 타이타닉 호에서 인양된 숟가락은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곧 경매에 부쳐졌다.
남 숟가락 뺏는 재미로도 사는 세상에서 이 얼마나 장한가. “인간의 내면에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고 싶은 유치한 이기심이 존재한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첫 구절 그대로다. 다행히 이타적인 유전자도 많아 그럭저럭 평형은 유지된다. 이웃을 위한 푸드마켓에 라면 몇 봉지 기부하는 손길은 그래서 아름답다.
누구도 부유하다고 삽자루 들고 먹지는 않는다. 빈자도 부자도 숟가락은 하나다. 흔히 쓰는 '숟가락만 하나 더 놓는다'는 얻어먹기의 몰염치를 줄이는 구실도 한다. 실제는 추가되는 숟가락만큼의 추가 식비, 한계 비용이 더 든다. 남의 밥상에 재미 들린 무임승차자가 시장 기능을 불통시킨다. 공짜는 없다. 식품 시식코너도 미안한 심리를 구매로 유도할 의도로 마련됐다.
그런데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잠깐 올린 주제에 자기 밥상으로 우기는 기회주의자도 있다. 일부 대선 경선 후보들은 복지 밥상, 세종시 밥상 어디에든 숟가락만 걸치면 그만으로 여기는 듯하다. 살강 밑에서 주운 숟가락 달랑 들고 숟가락 생겼다고 생색낸다. 국민은 반기업, 반자본, 반시장적인 숟가락을 같이 얹자고 꼬드기는 실속 없는 숟가락 정치를 원치 않을 것이다. 적어도 경제 파이가 커진 밥상을 원한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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