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더욱 세종교육에 힘을 쏟을 방침이다. 교육격차 해소에 중점을 두고 OECD 수준의 교육환경을 유지하면서 조화롭고 품격 있는 창의인재 육성을 위해서 그 기반을 잘 설계해놓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형님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고 방황의 끝에 교사에서 교육감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역정과 세종시교육의 미래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 사진=이민희 차장 |
“개척정신이 강했던 할아버지가 아버님 형제분들 일부를 이끌고 서울로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던 중 잠시 머물다 안착하게 된 곳이 바로 송담리였어요. 결국 우리 가정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내 고향이 됐습니다.”
신 교육감은 할아버지의 피를 받아서인지 어떤 일이든 안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해보자 하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몸에 배었고 할아버지의 개척정신을 이어받았다. 맨손으로 무작정 떠나온 가족이 얼마나 궁핍했고 이겨 나가기에 얼마나 몸부림을 쳐야 했는가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연양초등학교를 다녔다. 살던 곳이 수용이 되어이제 폐교가 되었고 정부청사가 세워졌다. 중학교는 강다리를 건너 금호중학교에 6㎞정도를 걸어 다녔다. 살을 에는 강바람을 맞으며 다리를 건너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홍수 때는 목조다리가 끊어져 학교를 가지 못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이 같은 고난은 나중에는 제가 살아가는 데에 강한 의지를 터득하는 계기가 됐어요. 학교에서 나오면 전날 배운 것을 들고 나왔지요. 걸어다니면서 공부했어요. 그 시절에는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죠.”
당시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학교 끝나고 귀가하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뜰에 나가서 독새풀을 바가지로 훑어 모아 그걸 볶아서 죽을 해먹을 생각이 앞섰다. 또 자운영을 삶아서 나물을 해먹기 바빴다.
“그것은 잔디씨 모양으로 조그만해요. 그런데 그것을 볶아서 자운영 삶은 것과 함께 죽으로 끓여서 아침은 거르고 하루 두끼 먹었죠. 흰쌀밥이 그리웠죠. 아니 보리밥도 그리웠어요.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지냈지요.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몰라요. 그런 상황을 두루 거치니 어느 정도 극한의 어려움은 웬만하면 다 견딜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회상한다. 어린시절 기억 중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있었냐는 질문에 교육감은 가난이었다고 말한다.
“절박할 정도로 가난을 탓했어요. 어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죠. 다른 사람의 논을 얻어서 농사지었죠. 가을엔 지게로 볏단을 나르고 가족 모두가 매달렸어요. 저도 초등학교 때지만 예외가 아니었죠. 볏단을 지고 집으로 오면 가슴이 쪼그라들어서 아플 정도였어요. 키가 클 새가 없었어요. 공부는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여건은 안 됐어요.”
중학교땐 인분 나르기도 많이 했단다. 지게로 메면 출렁출렁, 오물 뒤집어 쓴다는 게 참 힘든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 걸으면 '출렁출렁'하면서 그 물이 튀지요. 고구마 밭에 인분 줄 때 메고 다녔어요.”
신 교육감에게 단 하나뿐인 일균 형님은 평생의 빚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당시 합격하기 어려운 금호중에 합격한 형님을 농사일 때문에 진학을 포기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는 대신 동생인 신 교육감을 택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이 형보다 더 싹수가 있다' 생각하고 중학교에 진학시켰다. 때문에 신 교육감에게 평생 안고 가는 큰 짐이 됐단다. 아버지의 선택이었지만 신교육감은 항상 가슴 한 쪽이 뻐근하다.
“저 때문에 희생한 형님이니까. 지금도 그것은 제가 안고 있는 짐이지요. 평생을 안고 가야 하고 지금도 형님을 뵈면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신 교육감의 고교 진학은 3년 전체 장학생으로 갈 수있는 공주 영명고였다. 신 교육감의 고교시절 꿈은 직업군인이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군대를 바로 가자고 결심한다. 가정형편을 생각해 하사 간부 후보생 3사관학교를 가서 직업군인이 되자 작정을 했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졸업할 때 담임 선생님이 공주교대 원서를 주면서 영명고는 대학 진학률이 낮으니 “시험이라도 봐라” 해서 합격하게 됐다.
당시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잘 들어가지도 못하는 곳을 학비도 싸다고 하면서 교대를 다니도록 했다. 사실은 공주사범대를 갈 뻔했다. 그 때 담임 선생님 덕에 당시 공주사대 국회의원 장학금 추천학생으로 확정이 되었다. 하지만 신 교육감이 살고 있는 곳이 공주 선거구가 아니라고 취소 되었다.
공주교대 생활은 화려했다. 학생회 부회장에 당선돼 축제인 '일락제'를 모두 총괄해 기획도 해보고 재미있었단다.
“뭔가를 하는데 도전하는 것이 괜찮았어요. 할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없이 뛰쳐나오는 개척정신과 비슷하지요.”
군대문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직업군인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어서 4년제 대학에 편입해 ROTC 장교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경희대쪽으로 편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반 당시 그해 6월 RNTC가 창단이 되면서 군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불운의 연속이죠. 꿈 꿨던 직업군인도 못되고 편입해서 다른 꿈도 접었고 그렇게 되어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이게 내 진로가 진짜 맞나 싶었어요.”
결국 신 교육감은 방황을 하게 된다. 태안 금흥초에 초임발령을 받고 2년여간 근무하다가 연기군내로 발령받아 연기군에서 쭉 근무한다. 연기군에서만 근무한 것은 초등교사에서 광역시 교육감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연기군에 와서도 외도가 시작됐다. 낮에는 교사,밤에는 축산을 하는 농민으로 살게된다.
“축산을 좀 대대적으로 해봐야하나 싶어 지금 세종시가 들어선 벌판에 하우스를 제가 처음 도입했어요. 하우스 재배를 하다가 이도 아니다 싶어 축산을 하자 해서 축사를 지어 양계가 1000마리가 들어가고 했었지요. 소도 한 20마리 있었요.”
하지만 돈은 벌지 못했다. 실패는 했지만 그 때 샀던 땅이 값이 올라서 다행히 만회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았단다. 그래도 뭔가를 좀 해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왜 이런가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의 개척정신 그 피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부인을 사랑하는 신 교육감도 연애시절이 있었다. 24살 때 학교 일만 열심히 하다가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보건소에 근무하던 지금의 부인과 첫 만남에서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다방에서 첫 만남을 갖는데 약속을 해놓고 서로 파티션을 등지고 앉았다. 거의 한 시간 기다리다 '바람맞았나 보다'하고 일어나는데 반대편 여성도 같이 일어나 딱 마주쳤다. 그래서 사귀게 됐다.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 교유감은 힘을 준다.
“저의 교육철학이자 좌우명은 '상선약수'입니다. 가장 삶의 아름다움은 물흐르는 것과 같이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을 해봐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나의 길은 교직인데 엉뚱한 짓을 했었다는 걸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교직에 좀 더 올인했으면 그런 생각은 안들었을 텐데. 무슨 군대를 가고 농사를 짓고 하려 했는지. 나에게 정해져 있는 나의 길을 이탈하려 하니 어려웠던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며 상선약수의 철학이 '작은 것으로 다투지 말고 겸손하며 여러 사람과 같이 소통하고 더불어서 살아라'는 철학 같아요. 물이 돌도 깨뜨려서 아주 부드럽게 만들잖아요. 오묘한 철학이 담겨 있는 '상선약수'. 저에게 맞는 철학이지 않나 싶어요.”
새로 태동된 세종시에서 교육의 가장 큰 당면 현안과 대책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격차해소라고 답했다.
세종시가 확정되는 과정에서 편입 지역의 학교와 교육환경에서 큰 차이가 나는 상황이 발생했다.
편입지역의 교육비 지원, 노후화된 학교시설 개선과 스마트교육체제 구축을 통한 교육환경 격차 해소 등을 위한 재원이 확보될 수 있도록 교과부에 지원요청 협의를 하고 있다.
또한 편입지역은 학교별로 특화된 방과후학교를 운영하면서 인접한 3~4개교가 연합된 학교군을 형성하여 학생간 이동수업을 받을 수 있는 특화된 학교운영 모델을 도입ㆍ운영하도록 추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예정지역과 편입지역 학교간 교류가 가능토록 확대해 도ㆍ농학교 교류의 선도모델을 확립하고자한다. 세종시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족기능 확보와 상주인구 유입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교육여건 조성 계획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 공주영명고 시절의 신 교육감<사진아래 앞줄 왼쪽 세번째>. |
효문화 확산을 강조한다. 신 교육감은 '세계를 선도하는 희망찬 세종교육'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세종교육이 국제화의 선두모델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있다. 또한 '조화롭고 품격높은 창의인재 육성'이라는 교육지표를 구현하기 위해 다섯가지 중점과제를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역점사업으로는 '올리사랑운동'의 전개와 '학생이 찾아가는 특성화교육 프로그램 운영'이다. '올리사랑운동'을 통한 효 문화 확산으로 바른 인성의 학교문화를 형성한다는 계획이다. '학생이 찾아가는 특성화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학생들의 선택권 존중과 다양성을 가진 세종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다. 세종시의 성공을 위해서는 각 기관의 협력과 지역사회와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봤다.
“저는 욕심을 많이 부리지는 않습니다. 그저 기초 기반만 잘 설비해놓으면. 2년 동안 무슨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세계를 선도해 나가는 희망찬 세종 교육에서 추구하는 조화롭고 품격 높은 창의인재 육성을 위해서 제가 그 기반을 잘 설계해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기반 중 하나가 교육 협찬을 빨리 해소 할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세종 교육 방향을 잘 잡을 기반 설계를 착실히 하자, 그 간 너무 차이 났던 교육 격차를 해소해 주자. 내가 힘 닿는 데 까지는 (교육격차를) 해소 해 보자. 두 가지는 꼭 해보려 합니다.”
신 교육감은 “세종교육이 세계적인 명품교육 도시가 되려면 우리 교육청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절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종시민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중앙부처 및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라고 강조한다.
대담=김형중 지방부장(부국장)ㆍ정리= 김공배 부장
●신정균 교육감 누구?
▲1949년 5월 4일 연기군 남면 송담리
▲ 공주영명고, 공주교대 졸업
▲ 초등교사:근흥초, 연봉초, 연양초, 금사초, 연세초, 영대초, 대률초, 조치원대동초
▲ 장학사:연기교육지원청, 충남도교육청 교육정책기획과, 초등교육과
▲ 초등교감:연동초
▲ 초등교장:전의초, 조치원대동초
▲ 교육장:연기교육지원청
▲ 2011년 8월 31일 정년퇴임
▲ 기족관계:부인 이명연, 1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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