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길 잃어버림에 대하여

  • 오피니언
  • 사외칼럼

[김중겸]길 잃어버림에 대하여

[논단]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승인 2012-07-12 14:08
  • 신문게재 2012-07-13 20면
  •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대밭 지천인 곳. 거기 해발 400m 고지 농원에서 이틀. 비빔밥이 감칠맛 나는 고장. 그쪽에서는 한옥마을 옛 가옥에서 이틀. 태어나 익숙한 지방과는 다른 데로 가렵니다. 기별이 이렇게 당도했다. 아, 시절이 그리 됐구나. 떠나는 철 왔구나. 오시라, 오시라 하는데도 간다, 간다 하며 못 갔던 은중 아우네. 이번엔 다녀올까?

늘 다니던 길도 또 나서면 새롭다. 동행 있으면 더 좋다. 의외의 발견. 어이없는 실수. 이런 게 어우러진다. 서로의 재확인도 이루어진다. 함께 길가는 이의 인생과 내가 합쳐진다. 이럴 때 길 좀 잃어버리면 어떨까? 일상에서야 그랬다간 한참 뒤쳐진다. 그러니 행여 이 삶에서 질까 꼭 붙들고 산다. 길 잃을까 노심초사. 어디 한시라도 편한 날 있나. 여행길만이라도 그런 걱정 내려놓으면 좋겠다. 아등바등 잊지 않고 잃지 않으려 하면 재미 달아난다. 다행스럽게도 길 잃어도 행복감 느끼는 건 가능하다. 그런 곳 있다.

먼저 캔버라. 양모업자들이 만든 거리. 양의 등 같은 가지런함. 길 잃으면 주유소 servo에 들른다. 알려 준대로 가다 양떼 만나기도 한다. 괜찮다. 이름의 어원이 만남의 장소다. 이스탄불은 제국 셋의 수도였다. 황제의 도읍. 헤매야 그 영광 알게 된다. 길 잃어도 걱정할 게 없다. 찻집에 들어간다. 버찌주스로 목 축이며 길 묻기만 하면 된다. 런던은 보이는 게 다 역사다. 여기서 길 잃어야 해지는 날 없었다던 대영제국 실감. 오늘 속에 살아있는 과거에 취해 길 잃는다. 지하철 타면 걱정 끝. 1863년 개통된 명물이다.

도쿄의 생명력은 주민의 친절에 있다. 길 모르겠거들랑 아무에게나 물어본다. 데려다 줄 정도다. 노인네 손에 끌려 황궁 구경했다. 베니스는 물의 도시다. 굳이 물에 빠질 필요야 없다. 곳곳에 산재한 르네상스의 흔적. 인문학의 향기 속에서 길 잃으면? 리알토 찾아가면 된다. 그게 뭐냐고? 랜드 마크 다리다.

바라나시는 갠지스 강변도시다. 인도인들은 확실한 이정표 갖고 사는 인간은 없다고 믿는다. 길 잘 모르고 길 잘 잃기 십상인 존재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인생 알려고 여기에 온다. 이쪽에서는 장례 치른다. 저쪽에서는 산 사람이 목욕재계한다. 정답 얻지 못 한 채 귀로에 오른다. 영혼의 길은 언제나 미로라 생각하며 돌아간다. 현실의 길은 오죽 하겠는가 한다.

내 곁에도 길 잃어도 맘 편한 곳 있다. 내 고향 장항이다. 거기선 요즘 깜빡깜빡 길 잃곤 한다. 그럴 때 뭔가 깨닫는다. 어라, 이거 변한 게 한둘이 아니구나.

저번에도 창선동 집 찾기 실패! 아직 거기서 버티고 사는 준모 형에게 묻는다. 바로 저기잖아 한다. 그제야 기억창고가 되살아난다. 길눈 그렇게 어둡냐 하시는 할머니. 거기 계셨다.

요즘 같은 장마철 비오는 날 마당. 그 안에 서 계셨다. 싸릿대로 땅바닥 찰싹찰싹 치셨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뱀. 되돌아 나가게 하셨다. 결코 잡으려 하진 않으신다.

그러면서 오늘도 동무들이랑 뱀 잡았느냐 물으셨다. 그 미물도 생명이다. 그러면 안 된다 하셨다. 어울려서 어쩔 수 없이 했느냐. 꼭 나뭇가지에 걸어 놓으라고 이르셨다. 그렇지 않으면 변 당한다. 저번처럼 몰래 장독대 뒤에서 오줌 싸면 큰일 난다. 각시 뱀이 신랑 뱀 원수 갚는다. 네 고추 꽉 문다 어르셨다. 정말? 뒷담 텃밭으로 도망친다. 마침 쇠비름 가지 끝에 노랗게 꽃 피었다. 뽑아서 뿌리 훑는다. 흰색이 붉게 변한다. 재미있어 뽑아댄다. 할머니는 많이 뽑아 오너라고 하신다. 물에 데치고 말려 겨울나물 만드신다.

먹으면 장수한다는 장명채(長命菜). 정작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단명. 어머니와 아버지도 일찍 작고. 나는 할머니가 무친 나물 그 이름 장명채와 그 꽃말 애정 덕에 오래 살아내는가. 장마 끝나고 피는 작디작은 꽃. 개망초. 꽃무리 왼쪽으로 어망공장. 이어지는 안남미 창고. 더 가면 도선장. 내비에 아웃소싱 한 기억 환수했다. 그러자 뇌리 속 생생지도 재생됐다.

온몸 뒤틀린 장근이. 구걸해온 왕사탕 내미는 손 보인다. 그 앞이 살던 집. 잃어버림과도 화해한다. 개망초 덕분이다. 정신 놓고 살지는 않을 거 같다. 철들었나. 나하고 내 고향 구경 갈 사람은 연락주시고.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연고 e스포츠 구단 속속 늘어난다
  2. [날씨] 이번 주말 돌풍 동반 강한 비 내려
  3. [현장취재]민주평통 대전서구협의회, '따뜻한 동행! 윗동네·아랫동네 손잡고 함께하는 영화나들이'
  4. '국회의 완전한 세종시 이전', 무산된 행정수도 재소환
  5. 대전CBS 13대 운영이사장에 김철민 목사 취임
  1. 산업인력공단 대전본부장에 신장호 취임 "지역 경제성장 마중물 최선"
  2. 폭염 대비 ‘저소득 어르신 건강한 여름나기’ 후원
  3. [현장을 찾아서]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정년퇴임식
  4. 국립한밭대 '글로컬대학30 및 통합추진 원칙' 대학 구성원과 공유
  5. '세종시=행정수도' 거점, 세종동(S-1) 국가상징구역 미래는?

헤드라인 뉴스


대전역세권 개발과 맞물린 정동·중동 재개발 정비사업 `관심`

대전역세권 개발과 맞물린 정동·중동 재개발 정비사업 '관심'

대전시가 대전역 주변을 중심으로 '메가 충청 스퀘어 조성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정동·중동 재개발 정비사업'에 관심이 쏠린다. 메가 충청 스퀘어 등 대전역세권 일원이 복합 인프라를 갖춘 공간으로 탈바꿈할 것으로 전망돼 인근 지역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어서다. 27일 대전시에 따르면, 대전 도심융합특구는 대전역세권과 선화구역 일원 142만㎡에 2031년까지 사업비 2조3000억 원을 투입해 메가 충청 스퀘어와 복합환승센터, 문화공간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메가 충청 스퀘어는 소제동 일대 1만4301㎡, 연면적 22만9000㎡의..

6·25 전사 경찰관, 74년 만에 국가의 품에 안기다
6·25 전사 경찰관, 74년 만에 국가의 품에 안기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27살의 경찰관 아빠는 6살 어린 딸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은 후 집을 나섰다. 쏟아져 내려오는 북한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그의 유해는 2007년 발굴된 후 올해 초 신원이 확인됐고, 2024년 6월 27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지 74년 만에 드디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경찰청은 27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최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전사 경찰관에 대한 유해 안장식을 거행했다. 이번에 안장되는 전사 경찰관은 6·25 전쟁 당시 서..

대전, 바이오 신약 개발 `날개`… 글로벌 경쟁력 확보 발판
대전, 바이오 신약 개발 '날개'… 글로벌 경쟁력 확보 발판

대전시가 정부의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로 지정되면서 제약 바이오 글로벌 중심 도시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연구개발(R&D) 인력이 풍부한 대전시에 정부와 지자체의 장기간 대규모 지원이 이뤄지면서 바이오 신약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27일 산업통상자원부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 결과 바이오 의약품 분야에서 대전이 최종 선정됐다. 이로써 대전은 각종 굵직한 예산과 각종 혜택의 주인공이 되면서 신약 개발 과정에서 겪었던 설움을 한 번에 털어낼 수 있게 됐다. 대전은 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마철 앞두고 방치 절개지 ‘아찔’ 장마철 앞두고 방치 절개지 ‘아찔’

  •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장애인들의 아름다운 도전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장애인들의 아름다운 도전

  • 텅 빈 의원석…대전시의회 의장 선출 못하고 파행 텅 빈 의원석…대전시의회 의장 선출 못하고 파행

  • ‘최저임금 인상하라’ ‘최저임금 인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