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영 작가, 대전중구문학회 사무국장 |
스무살 초반 시절 문학공부를 한답시고 고향 서천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며 살 때였다. 유난히 비를 좋아한 탓에 사랑방에서 누워, 책을 보며 빈둥빈둥 하다가도 비만 오면 마치 신(神) 들린 사람처럼 우편물(지방 방송국과 신문사 독자란에 보낼 투고물)을 우체국에 부친다는 핑계로 우산을 쓰고 집을 빠져 나온다.
뻐얼건 황토 흙으로 질퍽대는 느르매 고갯길을 너머 푸르른 대숲이 드문드문 서있는 마을길을 지나간다. 특히 이슬비나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는 신작로 위를 혼자서 처벅처벅 걷노라면 양 옆으로 일정하게 서 있는 가로수 나무 아래로 가끔 바람이 불었다. 후두둑 후두둑하고 굵은 빗방울을 어깨위로 맞으며 이름없는 팡세가 되어 콧노래를 부른다. 길을 걸으며 더러는 푸시킨의 '삶'과 사뮤엘 뉴만의 '청춘'이란 시도 낭송하며 걷곤 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30여분을 걷노라면 면(面)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허름한 옛 일본식 건물인 우체국이 나온다. 늘 가면 만나는 상냥한 우체국 직원과 반가운 인사를 하고 우편물을 빠알간 우체통에 부치고는 소재지에 있는 이발소, 막걸리 집, 정류소, 방앗간 뒷방들을 기웃거린다. 왜냐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몸과 마음이 촉촉이 젖은 한적한 날 울적한 분위기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임자를 찾아 막걸리 한 잔(실제는 말 술)을 걸쳐야만 그날의 기분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역의 몇 몇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받는 인사는 대략 이랬다.
“야, 너 엊그제 신문에 나왔드라.”
“엊그제 방송서 글 나오던디 잘 들었어.”
“야, 너 제법이드라 책에 사진이 나왔던디 말여, 짜아식!” 이때마다 제법 알려진 작가라도 된 듯 우쭐했다.
“뭐, 쬐끔 써 봤는디”, “아아녀, 그냥 내 본건디 말여”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리곤 했다. 그 당시 방송과 신문에 나오는 글들은 대부분 수필류로 라디오 문화프로에 애청자의 서간문 정도나 신문 문화면 끄트머리에 작게 나오는 독자란 정도였는데 그럴 때 마다 제법 우쭐대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렇게 막걸리 적임자가 결정되면 가끔가서 외상도 하고 더러는 부모님 몰래 광에서 쌀을 퍼내다가 술과 맞바꿔 먹거나 인근 고추밭에 한밤중 고추 서리 같은걸 해서 술과 맞바꾸어 먹는 단골 막걸리 집을 찾아가 시어터진 김치나 두부, 마른 명태를 툭툭 치면서 막걸리를 실컷 마셨다. 술을 마시다보면 동편 남산께로 어둠이 어스럼 어스럼 몰려오고 촉촉이 막걸리로 배인 몸을 휘청거리며 집으로 향하곤 했었다.
이런 '비 오는 날의 이름없는 팡세' 의 행렬은 비만 왔다하면 치러지는 설렘과 꿈의 나날이었다. 굵은 빗발의 소나기가 내리는 장대비나, 밤비가 올 때는 집에서 방문을 열어놓고 뒷산 계곡에서 콜콜콜 흐르는 뻐얼건 빗물이 밭도랑을 타는 흙탕물을 보는데 그쳤다.
그러나 밭에 고추 모종하기에 알맞게 내리는 모종비나, 이슬비 보다는 굵고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또는 가랑비 보다는 가는 는개비가 치적치적 내릴 때면 스무살 초반의 문학청년을 시원하게 뻗은 아스팔트 위를 걷게 하곤 했다.
특히 안개보다는 좀 굵고 이슬비 보다는 좀 가는 안개와 이슬비의 중간 쯤 되는 '는개비'가 내릴 때는 우산도 접어든 채 머리칼과 옷을 촉촉이 적시며 걷기를 좋아했다. 속눈썹을 간지럼 피며 살짝 적시는 는개비는 참으로 좋았다. 이렇게 걷는 걸 좋아하는 걸 보고 주위 사람들은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저렇게 비를 맞고 걸으면 감기도 걸리고 옷을 적시며 내쳐 넋이 나간 사람처럼 걷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비 오는 날의 이름없는 팡세의 행렬은 몇 년간 고향 근처를 맴돌며 계속됐다. 오늘 아침 창 밖으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며 '비 오는 날 추억의 팡세'가 되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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