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판에는 “제월당 송규렴이 만년에 제자를 모아 강학하던 공간이다. 원래 미호서원의 부속건물로 숙종27년(1701)에 건립하여 당시에는 정조 대왕이 어필로 내린 사호각(四湖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없어지고 제월당 송규렴이 쓴 상량문이 남아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조대왕이 어필로 내렸다는 부문은 맞지 않다. 제월당은 1630년(인조8)에 태어나서 1709년(숙종35)에 죽었다. 정조는 조선의 22대 왕으로서 재위기간은 1777~1800년이다.
송규렴이 죽은 68년 뒤에 왕위에 오른 정조가 어필로 내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둘째, 제월당이 지은 건물은 '미호신사(渼湖新舍)'로 취백정(翠白亭 ㆍ四皓閣)과 제월당은 무관하다.
제월당의 문인들이 제사공간으로 지은 건물도 '미호서원(渼湖書院)'이었다.
취백정 및 사호각은 제월당의 증손자인 송재희(1711~1776)의 아호다. 특히 사호각은 영조 재위 시 (영조가 승정원에 내린) '사호각(四皓閣)'이란 어필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셋째, '미호신사(渼湖新舍)'는 미호서원의 부속건물이 아니다. 미호신사는 1701년에 지었고, 미호서원은 1717년에 지었다. 또 지은 위치도 상당히 다르다. 그러므로 부속건물이란 표현은 바르지 않다. '미호서원의 부속건물'이란 말은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사호각(四湖閣)의 한자 표기는 '四皓閣'이 맞다. 중국의 '상산사호(商山四皓)'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이다. 상산사호란 진나라 말기에 폭정을 피해 상산에 숨어 살았던 네 명의 노인을 말하는데, 후세에 나이도 많고 덕도 높은 은사(隱士)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다섯째, 제월당이 쓴 상량문은, 제월당이 지은 상량문이 맞다. 미호신사에 걸려있는 상량문 현액은 다시 서자(書者)를 상고해 보아야 한다. 설명문으로는 제월당에 쓴 것으로 오인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제월당이 쓴 것이라면 300년은 족히 되었을 터인데 300년의 풍상을 겪은 편액으로 보기는 어렵다. 문이 닫혀 있어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제월당이 지은 상량문이 문집에 있다”정도로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정곤 객원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