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20일, 김재현기관사를 비롯한 철도원들은 그들의 애마 미카129호와 함께 북한군에 포위된 미24사단 딘소장구출작전을 위해 33명의 미군특공대를 태우고 대전역을 향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옥천을 떠나 세천을 지나자 북한군의 매복공격이 미카129호에 쏟아졌다. 목적지 대전역에 도착하지도 못한 체 부상자1명을 제외한 미특공대원 32명과 28살의 젊은 기관사 김재현도 숨을 거둔다. 그리고 당시 신호원이였던 장시경이 기관사로 투입 2차구출작전에 돌입했으나 작전은 실패하고 만다. 김재현기관사는 6.25전쟁 최초 철도참전전사자 로서 서울현충원에, 함께 참여했던 현재영, 장시경 철도원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당시 그들의 애마였던 미카129호 증기기관차는 그 후 1967년 디젤기관차의 등장과 함께 운행을 멈추고 2008년 등록문화재 415호 지정되어 철도원이 영면해 있는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져 철도참전용사들과 아픈 기억을 증언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미카129호는 1940년대 일본에서 제작되어 조선총독부부 철도국 경성 공장에서 조립된 텐더식 증기기관차로 경부선 등 전국을 누빈 철도시대의 주역이였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 근대의 사람들은 증기기관차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 땅에 처음 증기기관차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화륜거’라 불렀다. 불로 달리는 인력거라는 인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화륜거를 본 사람들의 문화적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 이였다.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중략...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라고 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수개월이 걸리던 물리적 공간을 단 1주일만에 주파하는 증기기관차를 보는 근대 사람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도구였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원대한 포부와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한 교통의 도구였지만 근대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활환경을 바꾸게 하는데도 일조했다. 수탈의 도구에서 6.25참전 그리고 수많은 피난민을 실어 나르며 이산의 아픔까지도 담아내고 있는 미카129호 증기기관차는 역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문화자원으로 현충원에서 멈추었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박종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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