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고 최영복 교장<사진 왼쪽>과 손창옥 교감이 동방학원 설립자인 이병익 장로 동상 앞에서 재단 건학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
1924년이었다. 일본 식민통치 하의 착취와 억압으로 어려웠던 시대, 동방학원 설립자인 이병익(84) 장로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지만, 기독교 신앙에 일찍 눈을 뜬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해방 후 북한이 공산주의를 선택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억압이 시작됐다.
이어 민족전쟁인 6ㆍ25가 발발하면서 형제들은 강제 징집돼 전쟁터로 내몰렸다. 뿔뿔이 흩어진 그의 가족들은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됐다. 전남 목포까지 피란생활은 이어졌다. 생계를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은 없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대전행을 선택한 건 1959년이었다.
#대전에 삶의 터전을 세우다.
대전중앙시장이었다. 대전에 삶을 터전을 세우기 위해 그는 1960년 초에 현재의 대전중앙시장에 포목상점을 열었다. '동방상회'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통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생산과 소비,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물건이 없어 팔지 못할 정도로 봉제산업이 번성하면서 동방산업이 탄생했다. 이어 대성산업을 비롯해 공주와 평택, 송탄에 이르기까지 공장을 설립했다. 금융기관인 '국보상호신용금고'도 창업했다.
대전중앙시장에서 포목상점을 시작으로 봉제공장 개발사업, 신용금고, 엔지니어링 회사 등 다수 회사를 거느리는 대기업의 총수가 된 셈이다.
지역사회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수출증대 산업표창(1976)을 비롯해 국민훈장 석류장(1987) 등의 표창까지 받게 됐다.
#여성교육에 눈을 뜨다.
동방산업이 성장하면서, 직원만 3000명이 넘어섰다. 하지만, 근로자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것도 여성이 대다수였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교육, 그것도 여성교육 중요성을 보고 배웠던 그였다.
그래서 결정한 게 바로 산업체 부설학교였다. 동방산업 부설 혜천여자중ㆍ고등학교를 세웠다. 말 그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곳이다. 우리나라를 이끌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자고 꿈꾸며,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도, 그 시작은 '어머니'였다.
물론, 기업에서 창출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라고 생각하며 국가의 백년대계와 지역사회의 발전이 교육에 있다는 신념도 한 몫 했다.
#여성교육의 닻을 올리다.
동방산업 부설 혜천여중ㆍ고 설립은 동방학원의 동방여중ㆍ고와 혜천학원의 혜천대, 혜천대 부속 유치원 설립의 모태다.
혜천여중ㆍ고를 운영하던 이병익 장로가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나선 건 1979년이었다. 학교법인 '신성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설립한 당시 신성학원은 경천(敬天), 위국(爲國), 애인(愛人)을 건학이념으로 내세웠다.
1990년대 모든 기업체를 정리하고, 서구 복수동의 버려진 모퉁이 같은 땅을 일궈 오늘의 거대한 육영의 터전을 이룬 첫 시작이었다. 교육환경이 열악하던 1980년 2월 15일 황무지와 같던 복수골은 동방여자중ㆍ고 신축 기공으로 교육 터전의 새 장을 열었다. 기공식을 한 뒤 5개월 후인 1980년 7월 21일 별관 교사(현재 동방여중)가 준공됐고, 원동초등학교를 빌려 수업하던 동방여중ㆍ고는 이사했다.
이때의 고교는 5학급, 학생 수 300명이었다. 그 해 10월 10일 학칙 변경을 통해 고교는 10학급의 인가를 받았다. 당시 신설 학교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남녀 공학을 택하다.
동방여중ㆍ고는 최신식 시설을 갖춘 최고의 학교로 짧은 기간에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대를 비롯해 수도권 주요 명문대학에 60여명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명문이었던 대전여고와 견줄 만큼이었다.
하지만, 교육제도와 환경이 바뀌고 교육중심이 둔산신도시로 이동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7년 3월 1일 동방여고에서 동방고로 교명을 바꾼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방학원으로서는 2007년은 재단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한 해였다. 여성교육의 산실로 역사와 전통의 동방여고에서 동방고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명문 남녀 공학 고등학교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재단도 분리 독립했다. 신성학원에서 출발해 혜천학원으로 불리다가, 남녀 공학을 선택하면서 혜천학원에서 분리 독립해 2006년 동방학원(이사장 이한종)이라는 재단을 세우게 된 것이다.
최영복 동방고 교장은 “남녀 공학 초기에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명문사학으로서 제2의 도약기의 발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동방고등학교 전경. |
재비상을 향한 동방학원의 꿈은 동방고가 주도해 실현하고 있다. 동방고의 꺼지지 않는 불, '홍익반'은 성적우수 학생을 대상으로 심화학습을 운영해 체계적인 수준별 학습을 지원하고 있다. 학년별로, 각 반에서 상위 10% 학생들을 교사가 자매결연을 통해 지도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수월성 교육 차원에서 더 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차원에서 홍익관이라는 도서실도 만들었다. 학년마다 30명씩 선발된 학생들의 자기주도학습을 위한 공간이다. 더 이상 정체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재단 설립 초창기 명문사학이라는 옛 명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재단의 탄탄한 지원도 한 몫하고 있다. 동방학원은 대전에서 가장 튼튼한 재단으로 꼽힌다. 재단전입금이 거의 없는 사학이 적지 않지만, 동방학원의 재단전입금은 매년 8000만원이 넘는다.
기본적인 재단전입금과 연금, 건강보험 외에 순수한 교수학습비로만 쓰인다. 교사의 연구활동과 학생 장학금도 여기서 지원한다.
설립자가 경영하던 기업을 모두 정리하며 기본적인 수익재산을 학원에 남겨놨기에 가능하다. 물론, 재정 운영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이병익 장로는 “인재 양성의 요람, 지식 축척의 면학 터전이라는 이념 아래 그리스도의 정신을 계승하고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학원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희진ㆍ사진=손인중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