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용 대전성룡초 교감 |
틈나는 대로 아이들에게 글을 써 보라고 했다. 시골 아이들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글 속에 묻어났다. 매일 아침마다 설거지한 후에 20리 길을 등교한다는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글이 형식면에서 잘 됐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필자의 가슴을 적시거나 뭉클하게 하는 내용이 참 많았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고 하면서도 교정해 줄 수 없어 안타까웠다. 글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으려니와, 자칫하여 필자의 손을 거치면서 엉망진창이 될까 두려웠다. 고민 끝에 각종 글쓰기대회나 어린이 잡지에 아이들의 글을 투고해 보기로 했다. 전문가들이 어떤 작품을 선정하는지 눈여겨보며 글에 대한 안목을 키울 요량이었다. 아이들의 글을 자주 투고하다 보니 하나, 둘씩 입상했다. 신문이나 어린이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의 작품평을 암기하다시피 숙지하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아이들 작품을 보는 눈도 조금씩 생겼다.
교직 1년 만에 글쓰기를 지도하는 교사 소리를 듣게 되었다. 글쓰기 지도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글쓰기 지도 전문가라니. 누가 지도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장학사께서 글쓰기 지도 방법을 정리해서 제출해 보라고 하셨다. 두서없이 적어냈는데 교육감상이 나왔다. 꿩 먹고 알 먹은 결과가 되었다.
5학년 2학기 때 맡은 아이들을 졸업까지 시키던 그 해 3월에, 필자도 고향을 찾아 충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경기도를 떠나면서 첫 제자들에게 의미 있는 것을 남기고 싶었다. 아이들의 글을 모아 학급문집을 만들기로 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어 모든 인쇄물을 등사판을 일컫는 가리방(일본어)으로 만들었다. 파라핀 성분이 섞인 얇은 등사원지를 철판에 올려놓고 철필로 글씨를 썼는데 툭하면 찢어졌다. 공들여 썼기에 무척 속상했다.
타자기로 바꿔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 한 자 쳤다. 삽화도 그려 넣었다. 천이 달린 등사판에 인쇄할 때 잉크가 팔과 옷에 묻기도 했다. 그래도 한 장 한 장 아이들의 작품이 종이로 인쇄되는 모습이 그냥 좋았다. 한겨울에 꽁꽁 언 잉크를 녹여가며 한 달 만에 54쪽짜리 '20명의 꾸러기들'이란 타이틀을 내건 학급문집이 탄생했을 때의 마음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아이들에게 졸업선물로 준 후 몇 부는 집에 보관했었다.
29년을 보관하고 있었던 바로 그 문집의 주인공들이 대전까지 내려왔기에 한 권씩 나눠주었다. 여유분 2권을 더 얹어 주었다. 제자들은 뜻밖의 소중한 보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 제 자식들에게 엄마의 초등학교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며 으스댔다. 제자들이 돌아간 후 며칠 있다가 연락이 왔다. 동창 모임에 학급문집을 갖고 나갔는데, 제자들이 종이도 누르스름하고 잉크가 베어서 뒷면 글씨가 비치는 해 먹은 문집을 서로 갖겠다고 아우성이었단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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