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얼마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책을 접했다. 1994년 언론사 최초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을 보도한 오연호의 『노근리 그후』에는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이 나온다. 6ㆍ25전쟁 당시 한여름의 미군의 학살극은 끔찍하고 공포스러웠다. 결국 나는 노근리 쌍굴다리를 마주하고 섰다. 마침 굴다리를 지나가던 동네 노인에게서 그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1950년 7월, 당시 12살이었던 노인은 부산으로 피란갔다 돌아와서 쌍굴다리에 시체가 쌓인 걸 목격했단다. 치아가 다 삭은 노인은 그날을 회상하며 몸서리쳤다.
『노근리 그후』에 의하면 유족들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죽은 이를 대신해 살아남은 자의 삶은 차라리 업보였다. 죽음은 사실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죽음은 항상 남겨진 사람들의 것이다. 민간인이든 전장에서 싸운 군인이든 전쟁을 경험한 이들의 상흔이 얼마나 깊고 끈질긴 지를 나는 안다.
나의 아버지 역시 6ㆍ25를 겪은 상이용사다. 유년시절 난 밤마다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아버지의 악몽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개짖는 소리마저 어둠의 정령이 삼킨 깊은 밤, 적막을 깨뜨리는 건 아버지의 흐느낌이었다. 처음엔 작은 신음소리에서 시작해 차츰 흐느끼다가 울부짖음으로 커지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흔들어 깨운다. 악몽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난 그럴때마다 뭔지모를 불안과 공포로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 몸을 웅크린채 잠이 들곤 했다. 아버지의 악몽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은, 죽은듯 빠져드는 여름날 오후 낮잠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자명종 같은 것 아닐까. 고통없는 행복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은 괴롭고 죽음 앞에선 의연해질 수 없는 공포감을 안겨준다. 영화 '제 7의 봉인'의 안토니우스 블로크가 번뇌하듯 우리는 삶의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신의 응답이 없는 세계에서 노근리의 살아남은 자들과 나의 아버지와 나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인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단순한 군사적 행위가 아닌,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해 사담 후세인 체제를 전복시킨 목적이 중동지역에서의 패권 쟁취와 석유 확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는, 학살을 자행하는 집단은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6ㆍ25전쟁 당시 마릴린 먼로가 미군병사들을 위문하기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섹스심벌 먼로는 끈 달린 반짝이는 드레스를 몸에 딱 붙게 입고 군인들 앞에서 달콤한 노래를 불렀다. 먼로에게 열광하는 미군들 얼굴에선 민간인을 살육하던 학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칸트가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한 것처럼 영원한 평화는 현실적으로 아주 먼곳에 있다.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본다는 점이다. 중국이 부상하면서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를 지배하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싸움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다. 자칫 한반도가 6ㆍ25 때처럼 미국과 중국의 패권 대결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언젠가 반드시 남북통일을 해야 하는 우리가 빨갱이니 하는 '종북몰이'의 구태에서 허우적대는 정치인과 일부 언론의 행태는 무엇인가. 우리 내부의 편가르기는 통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강대국의 이권다툼에서 또다시 우리 땅에 그들을 불러들일 순 없다. 자국의 이익에 철저한 그들의 게임에 우리도 손익계산을 해야 한다. '웰컴투 동막골'은 판타지일 뿐이다. '웰컴투 노근리'도 없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