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나를 울리는 엠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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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나를 울리는 엠비시

[세설]한일수 대전충남민언련 공동대표, 두리한의원장

  • 승인 2012-06-20 16:06
  • 신문게재 2012-06-21 21면
  • 한일수 대전충남민언련 공동대표한일수 대전충남민언련 공동대표
▲ 한일수 대전충남민언련 공동대표, 두리한의원장
▲ 한일수 대전충남민언련 공동대표, 두리한의원장
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다. 서로 경향(京鄕)으로 멀어져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한 사이지만, 나는 그 친구가 나중에 내 관을 운구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생시킬 게 걱정이라 화장하기로 했으니 너무 염려 말게. 아무튼, 보통은 서로 예고도 사전 통고도 없이 만나게 되는 일이 많은데, 이번엔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신문에 친구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올라왔던 것이고, 걱정 반 근심 반으로 내가 먼저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친구는 흔쾌히 내전(來田)하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 크는 이야기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세상사는 이야기로 또 한 병이 넘어갔다. 손에 움켜쥔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시간이 흘렀다. 검고 푸른 밤이 맹인을 안내하는 골든 리트리버처럼 우리 옆에 웅크리고 앉아 가끔 코를 킁킁댔다. 낮에는 그렇게나 끈적이던 더위도 한밤에는 서늘하게 식어, 우리는 마냥 아이처럼 깔깔대며 두런두런 희희낙락 술잔을 주고받았다. 빈 병을 세자면 한 손으론 모자랄 때가 돼서야 친구는 왜 그랬는지 밝혔다.

“안 하려고 했어. 왕년에 충분히 했다 싶기도 했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후배들 보기가 부끄럽더라고. 아내는 파업하면 갈라서겠다고 하더군. 아이들 학비며 대체 쓸 게 얼마나 많냐며. 나도 다 알지. 그런데 견딜 수가 없는 거야. 숨만 쉰다고 사는 게 아니잖나. 참다가 결국 내발로 노조에 찾아가서 재가입하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열다섯 명이나 된 거야. 다들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더구만.”

내 친구는 지금 144일째 파업 중인 엠비시에 다닌다. 얼마 전 국장급 간부 15명이 공정방송을 위해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후배들의 파업에 동참할 때, 내 친구 이름도 거기 있었던 것이다. 보통 방송사는 간부가 되면 노조에서 자동으로 탈퇴가 된다고 들었다. 후배들이 그간 수고하셨다며 환송식까지 해주었는데, 그렇게 웃으며 나간 노조를 이제 정년을 걱정해야 할 국장ㆍ부장들이 다시 재가입을 하면서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이게 바로 엠비시의 현실이다.

29년 전,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민주주의 숨통을 잔인하게 조르던 때였다. 앞에 서자니 용기가 없었고, 뒤로 물러서자니 견딜 수가 없었던 대학 3학년 시절, 나는 매일 저녁마다 막걸리나 축내는 술버러지로 살았었다. 그런 나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이 좋았고, 오늘보다 내일이 좋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말이 왜 나에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는지, 어째서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에 없는 용기도 낼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앞뒤가 꽉 막힌 폐쇄된 공간에서 조그만 문 하나가 열리던 느낌은 지금도 강렬하게 떠오른다.

친구는 형편이 어려웠다. 일찍 작고하신 아버니 대신 어머니가 작은 분식점을 열어서 세 형제를 키우던 참이었다. 장남이던 친구는 그저 묵묵히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를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도울 길도 없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찾아 진학했고, 그 뒤로도 싫은 기색 없이 동생들 학비를 대고 장가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께 넉넉히 용돈 드리며 아이들 키우며 산다. 그런 그 친구가 파업이라니. 엠비시를 비롯한 방송사ㆍ신문사ㆍ통신사의 총파업이 왜 벌어졌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구하게 적지는 않겠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김재철 사장은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사장직을 사수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모든 국민들의 마음처럼 나 역시 파업이 하루속히 해결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입사 연차 20년을 넘겨 30년을 바라보는 고참 국장ㆍ부국장ㆍ부장들마저 파업에 동참하게 만드는 김재철이 사장으로 있는 한, 이 문제는 결코 풀릴 것 같지 않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이 깊었고, 긴긴 가뭄 탓에 유성천에서 건너 온 바람은 졸아붙고 메말랐다. 녀석의 시커먼 얼굴 위에 씨익 번지던 미소가 없었다면, 나는 울 뻔 했다. “힘내라 엠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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