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인중 기자 |
지난 11일 오전 8시 서구 탄방동 금성백조주택 사옥 집무실에서 만난 정성욱(금성백조주택 회장) 대한건설협회 대전시회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다부진 체구에 희끗희끗한 짧은머리, 누구를 만나든 반가이 맞이하는 정성욱 회장. 정규교육이라곤 초등학교까지 밖에 받지 못했지만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이젠 금성백조주택의 선장이자 건설협회 대전시회장의 수장이 됐다.
삼남매를 길러낸 홀어머니만 생각하면 삶에 대한 자신의 나태함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는 정성욱 회장은 삶의 고비마다 어머니와 가족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제 강점하에서 독립이 된 이듬해인 1946년 7월 당시 대덕군 회덕면 대화리 밤적골에서 태어난 소년 정성욱은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지역에서 제일 가는 만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광작을 했다. 아련한 기억이지만 당시 집에 찾아오는 사랑방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6ㆍ25 전쟁 이후 선친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면서부터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주택건설업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정성욱 회장은 고비마다 어머니로부터의 가르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재는 창업한 지 31주년을 맞은 대전의 대표 주택건설사 금성백조주택의 회장이면서 제8대 대한건설협회 대전시회장에 선출돼 지역 건설업계의 얼굴이 됐다.
- 어린시절 많은 고생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할아버지께서 꽤나 재산을 많이 가지고 계셨죠. 하지만 이후 5살 때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삼남매를 키워오면서 집안이 어려웠습니다. 회덕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책값을 다 내지 못해 벌을 받은 적도 있었죠. 책을 사지 못해 선배들이 쓰던 책 가운데 일부만을 구입해 학업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반친구들은 한밭중, 보문중 등 중학교 진학을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풍으로 병석에 누웠을 때 가지고 있던 논, 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대부분을 잃었다. 정성욱 회장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지만, 좋지 않은 기억인 만큼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렸을 때 주위로부터 솜씨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던데요.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솜씨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 때부터 집에서 쓰는 멍석과 삼태기 등을 만들 줄 알았습니다. 당시 한가지를 배우면 잊어버리지 않아 어른들로부터 솜씨가 야물다는 말을 종종 들었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조차 가지 못하자 주위에서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해 줘 14살에 졸업과 동시에 공장에 취직했지요. 가구점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4년동안 만들어보지 않은 가구가 없을 정도로 기술을 익혔습니다.”
이후 가구분야보다는 건설업이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정 회장은 목공 전문건설업체의 현장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가구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건설업에 이를 활용했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고 해서 당시 '이쁜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 평화건설에서 일하면서 모든 측량기구를 다룰 줄 알았고, 건설분야에 관해서는 설계도만 보면 모든 물량견적을 낼 수 있는 전문가가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설계도만 보고도 물량견적 95%이상 정확도를 맞췄으니까요”라며 밝게 웃는 정성욱 회장.
군입대를 앞두고 이런 기술을 습득한 덕에 당시 평화건설 대표가 제대한 뒤에도 돌아와 달라고 '러브콜'을 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제대 후에는 다른 건설업체들로부터 일괄 하도급을 받아 일을 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 주택건설업으로 창업을 하게 된 이유라도 있나요.
“그 때만 하더라도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동안 정부에서 건설업 신규 면허를 발급해주지 않았죠. 할 수 없이 1980년 주택건설업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1년에 사무실을 열면서 본격적인 아파트 사업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금성백조'라는 회사이름 역시 사연이 있다. 당시 회사명을 무엇으로 해야 할 지 고민이 많았는데, 하루는 시주받으러 방문했던 스님이 찾아와 '금성백조'라고 이름을 짓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 때 금성백조 세탁기가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어 이를 회사명으로 정했는데 이 때문에 금성백조주택이란 회사명이 금세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것 같아요. 이후 금성백조주택은 이름덕을 많이 봤습니다. 워낙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이름이어서요. 사람이름으로 따진다면 영희나 철수 쯤 된 것이죠.”
-사업을 하시면서 죽을 정도로 힘든 고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금성백조주택은 1984년 동구 비래동에서 아파트 100가구를 분양했지만 분양이 고작 10가구에 그치면서 정성욱 회장에게는 건설업에 뛰어든 이래 가장 큰 고비를 맞았다.
상황이 이쯤되다보니 금융비용 부담이 상당했다.
“하다못해 죽을 생각까지 했죠. 그래서 양복 주머니에는 항상 약봉지를 넣고 다녔습니다. 괴로움이 극에 달해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더라구요. 어느 날 죽으려고 술에 독극물을 타 놓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수절하면서 어린 삼남매를 키우며 희생해온 어머니가 떠올랐어요.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번 열심히 살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성욱 회장은 살아갈 방법을 찾던 끝에 1t 트럭을 몰고 다니며 핸드마이크로 미분양된 아파트를 팔기 위해 홍보했다. 때론 아파트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정 회장의 이 같은 피눈물 나는 노력이 결실을 거두면서 아파트 상당수가 전세 또는 분양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중구 중촌동 옛 대전교도소 터에 들어설 182가구 아파트 분양에서는 무려 분양경쟁률이 147대 1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건설사의 회장이면서 지역 건설업계의 수장이 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아직 기업을 키우려면 할 것이 많을 뿐더러 회원사들의 추대로 건설협회 대전시회장이 된 점 역시 많이 부족한 저에게는 과분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건설경기가 어려운 때 협회장을 맡게 돼 그 만큼 어깨도 무겁기도 하구요. 협회장으로서 지역건설업계를 대변하고 국가와 사회, 업계 등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성욱 회장은 일을 하다보면 고충도 있지만 슬기롭게 풀겠다고 했다.
“건설업체는 1군에서 7군에 이르기까지 각각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어려움을 파악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합리적인 방안을 회원사들과 협의, 도출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건설업계를 살펴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지역 건설업계를 끌어나가겠습니다.”
- 어려운 건설시장에서 업체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앞서 얘기했듯이 고통이라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롱런 여부가 갈린다고 봅니다. 사업을 하면 죽음의 문턱에 닿을 정도로 힘든 고비가 찾아오기 마련이거든요. 하지만 일부 업체는 그러한 고비를 넘어서지 못해 도산하거나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요. 지역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친 건설업체가 많지 않아 어려운 때 일수록 지역업계간 상호 협력을 통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정성욱 회장은 그러면서 “그러한 고난 극복의 자세야 말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담=백운석 경제부장(부국장) ㆍ정리=이경태 기자
●정성욱 회장은 누구?
▲1946년 대덕군 회덕 출생
▲회덕초(21회), 중앙대 건설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충남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한밭대 산업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 ▲금성백조주택 대표이사, 회장 ▲대통령 표창, 동탑산업훈장 수훈, 국무총리 표창, 2012년 한국창업대상, 한국효행효도회 효자상, 2006 한국의 CEO 대상, 대한민국 신경영대상, 대한민국 건설경영인 대상 수상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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