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월드컵경기장에 다녀오면서 분석심리학자 융의 '페르소나'를 리얼하게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축구장에 가면서까지 뭘 입을까를 고민하는 인간군상 말이다. 진작부터 필자는 페르소나를 '가면 쓴 인간'보다 '공적인 인간'으로 해석한다. 남들 앞에서는 뒤처지거나 튀고 싶지 않은 내향적 기질과 자존감이 발현된다.
그런 사회적 학습의 결과, 형식이 실질을 낳기도 한다.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폴로티 입은 약사보다 어쩐지 신뢰감이 든다. 오는 토요일 '何忘演'(하망연) 대전 콘서트를 여는 가수 박완규가 똑같은 노래라도 디자이너 이상봉 의상을 입고 열창했을 때는 왠지 모를 절제미가 압도한다. 임재범은 나치 복장을 하고 “자유를 향한 갈망” 표시라고 했다.
옷에서는 확실히 패션 이상의 그 무엇이 묻어난다. 정책으로 강제할 성질은 아니다. 정부가 '쿨(시원한)'과 '비즈니스(업무)'를 합성한 쿨비즈 정책을 선창하자 지자체나 기업 차원에서 슬리퍼를 신네 반바지를 입네 야단법석이다. 다른 각도에서 대전시청에서는 복장과 두발 자율화를 내놓았었다. 머리 염색에 청바지가 '상상과 창조'를 창출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제복이 업무 효율성을 많게는 50%까지 높인다는 연구는 여러번 봤다.
아끼자고 시작한 일인데 옷값이 백화점 옷값과 맞먹거나 아낀 전기세를 상회하게 생긴 것도 문제다. 배보다 배꼽을 키울 디드로 효과도 걱정이다. 철학자 디드로가 서재용 실내복을 선물 받고 그 옷에 맞춰 책상과 벽걸이 장식에 이어 서재 전체의 가구를 몽땅 바꿨다. 쿨비즈 남방셔츠 하나 사 입으면 바지, 재킷, 구두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 입고 싶은 욕구가 일게 마련이다. 아웃도어 열풍에서 선험적으로 겪었던 바다.
또 걱정할 것은 소비자의 자주적 욕망에서가 아닌 광고 등 주변에 자극받아 소비하는 의존효과다. 어느 것이든 드레스코드를 자율학습의 '자율'처럼 강요해서도 안 된다. 이러이러한 옷을 입으라는 예시나 꼭 단정한 넥타이 정장하라는 뚱딴지같은 지시나 그게 그거다. 대통령이나 시장(市長)이 예시하고 청와대 수석이 카메라 앞에 입고 나와 틀에 박으려는 것보다 착용자 개성대로 입어야 진정한 복장 자유다.
왜 그 기준을 '애정남'처럼 정하려 하는가. 만화 '식객'에서 “적당할 때 적당히 넣어서 적당히 끓이는 거다” 하자 “제일 어려운 것이 '적당히'란 말이에요” 했던 말풍선이 생각난다. 자기만의 페르소나를 간직한 '적당히' 잘 입기란 참 어렵다. 쿨비즈의 '쿨(cool)'에는 '뻔뻔스러운', '염치없는', '열의가 없는'의 뜻도 있다. 필요한 것은 비수기 패션업계의 시장 점유율이 아닌 시민의 마음 점유율을 높이는 정책이다. 에너지 절약에는 대찬성이지만 왜곡된 프레임으로 흐르는 데는 반대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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