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만에 자신이 몸바쳐 싸웠던 공훈을 인정받게 된 김형완씨가 정부로부터 받은 화랑무공훈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손인중 기자 |
1953년 6월 11일, 강원도 최전선의 철원 지역은 이날도 끊임없는 포성과 총성이 휘감고 있었다. 피아 구분없이 날아드는 양측의 포탄에 철원의 푸른 산천은 화염에 휩싸였고 전장은 피로 물들었다. 백마고지 전투, 피의능선 전투 등 영화에서나 보여지는 '고지전'이 이곳에서는 매일 같이 펼쳐졌다. 당시 스물 한살의 꽃다운 청년 김형완씨는 군에 자원 입대 했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적의 총탄 앞에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의 현장, 적을 쓰러뜨리지 않고는 자신이 살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하루 하루를 버텨야했다.
다시 방어전에 나선 그날도 김씨는 옆에서 피흘리며 쓰려져 가는 전우들을 지켜보며 싸웠다.
중공군은 어떻게든 연합군에 밀린 전선에서 앞서기 위해 재차 지원군을 파병하고 인민군과 함께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그런 적을 상대로 매일 밤낮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눠야 했고, 3일째가 되던 날에는 탄약마저 떨어져 버렸다.
중공군과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자포자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있던 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고, 바로 옆에 있던 부사수까지 날아온 포탄을 맞고 쓰러졌다. 악에 받혀 반쯤 정신을 놓고 있을 무렵, 배 아래가 차가워져 왔다. 김씨는 그렇게 날아든 포탄의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곳은 북쪽의 포로 수용소였다. 그곳에서도 어제까지 아군이었던 미군의 폭격으로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겨야 했다. 그리고 2개월여의 시간, 모진 고통을 이기고 1953년 8월 12일 종전과 함께 이뤄진 포로교환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60년, 김씨는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뒤로한 채 살아왔다. 때로는 생생한 무용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지옥 같은 전장에서의 기억은 하나의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전쟁의 기억, 김씨는 지난달 잊고 살았던 60년 세월에 대한 조그만 보상을 받았다.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인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으로 60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 것. 전장을 누볐던 참전 유공자이자 조국을 위해 싸웠던 그는 “지금의 평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지켜진 것”이라며 “애국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나라를 지킨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김형완씨가 지난 봄에 찍은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최근 받은 무공훈장을 3년전 사별한 부인에게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
“자랑스럽지만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축하전화를 하도 받다보니 쑥스러움이 앞선다. 손주들에게서 '할아버지 멋져요. 최고예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좋았다. 자식들은 지난 세월 남몰래 숨겨왔던 사실을 알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3년전 위암으로 먼저 간 아내에게 보여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사실 훈장을 받기까지는 내심 섭섭함도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아직도 제대로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6ㆍ25전쟁을 북침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일부 청년들도 있다는 사실에는 화가 치민다. 지금의 평화가 어떤 희생에서 나온 결과물인지, 왜 우리가 그렇게 싸워야만 했는지 조국의 산야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던 6월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항상 6월이 되면 죽은 동료들, 금화지구에서의 마지막 전투날 죽은 부사수와 친했던 전우들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 또 진퇴양난의 전장에서 밀려들어오는 전방의 적을 상대로 미친 듯이 죽여야만 했던 그때의 참상이 아직도 떠올라 괴롭기도 하다. 그때의 전장은 매캐한 화약 연기와 곳곳에 널부러진 시신들로 가득했다.”
-자원입대를 한 이유와 당시 상황은?
“고향인 영동에서 형제들과 함께 피란길에 올라 남쪽으로 향하던 어느날 인민군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대구에서 입대지원을 해 한달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라야 총을 쏘는 법, 탄창을 가는 법 정도에 그쳤다. 5사단으로 배치받아 전선에 투입됐을때 이미 수많은 전우들이 피로 물든 붕대를 하고 신음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기억은?
“크고작은 전투가 매일 이어졌다. 우리가 맡은 지역은 칠부능선에 있는 고지였다. 3명이 들어가면 움직이기 조차 쉽지 않은 호에서 밀려드는 적을 보고있노라면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적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내가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더 컸다. 목숨걸고 고지를 사수하면 다음날엔 적의 공세가 더 거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우들이 죽어갔다. 백마고지(철원ㆍ395고지)와 피의능선전투(양구)에서도 싸웠다. 하루는 인민군, 다음날에는 국군이 고지를 차지하는 사이 수백명이 죽었다. 피아 구분없이 포탄이 오갔고 귀청이 떨어져나갈만큼 매일 포성이 산을 울렸다. 단 하루도 화약 냄새와 피냄새를 안맡아본 날이 없었다.”
- 포로가 돼 끌려갈 당시 금화지구전투 상황은 어떠했나?
“매우 급박했다. 밀려드는 중공군을 상대하기가 벅찼다. 조금만 쏴도 과열되는 총을 들고 싸웠다. 밤이면 적들이 더욱 시커멓게 올라오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3일째 되던 날에는 탄약마저 대부분 떨어졌다. 중공군은 새로운 지원병력이 도착했고, 그들을 앞세워 다가왔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대대원들 대다수가 전사한 상태였다. 분대원인 부사수와 탄약수도 이날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들을 후방에 옮겨주고 다시 돌아왔을때 나도 곧이어 오른쪽 배에 포탄의 파편으로 부상을 입고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때 고지에는 이미 중공군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중공군의 트럭에 실린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이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북 넘어에 위치한 중공군의 포로 수용소였다.”
-살아 돌아 왔을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돌아와보니 전사처리가 돼있었다.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전사처리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시신을 찾지 못하자 실종으로 수정돼 있었고, 포로교환을 통해 귀환 후 2년여간 군 생활을 더하고 제대했다. 제대후에야 가족들을 만났는데, 사망통지서를 받지 않아 어디엔가 살아있겠구나 믿고 있었다고들 했다.”
-훈장을 받고 나서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안다.
“사실 훈장을 받기 전 섭섭했던 마음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목숨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우고도 제대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전우들이 더 있을 것이란 생각에 미안함도 앞섰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국가가 이들을 잊지말아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병역을 기피하거나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는 뉴스를 보면 답답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지켜졌고 지금의 평화가 숨져간 전우의 피의 대가임을 기억해야한다. 자신을 희생해 나라를 수호한 순국선열들을 잊어선 안된다. 21개월의 군생활 조차 힘들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한다. 국가가 있어야 나 자신도 있다. 군에 가는 것을 기피하지 말자. 자원입대해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당당한 청년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대담=이승규 사회부장(부국장)ㆍ정리=강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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