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순간 아들의 눈에 핑하니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는 이내 가던 길을 되돌려 집으로 내려왔다. 그날부터 아들은 마루 밑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노모의 거처를 마련했다.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석으로 음식을 나르며 정성껏 어머니를 봉양했다.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나라에 큰 우환이 생겼다. 이웃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이렇게 말을 전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우리 왕께서 쳐들어오겠다고 합니다.” 약한 나라를 깔보고 침략의 빌미를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문제는 이러했다. “똑같은 말 두 필 중 어느 쪽이 어미이고 어느 쪽이 새끼인가?”
문제의 답을 조정에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모든 고을에 방을 붙여 답을 구하기 시작했다. 아들도 그 방을 보았으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아들이 무심코 그 문제를 노모에게 이야기했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말을 굶긴 뒤 당근 한 포기를 가운데 놔 봐라. 밀어내는 게 어미이고 먼저 먹는 게 새끼란다.”
세월이 흘러 이웃나라에서 다시 문제가 날아왔다. 네모난 나무토막을 보여주고는 어느 쪽이 위고 어느 쪽이 아래인지 맞히는 문제였다. 조정 대신들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시 고을마다 방을 붙였다. 아들이 다시 노모에게 물어보자 이번에도 술술 답이 나왔다. “그것도 모르느냐? 물속에 던져봐라. 가라앉는 쪽이 뿌리가 아니겠느냐?” 아들은 이번에도 큰 상을 받았다.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자 이번에는 이웃나라에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다시 문제를 보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가 아니라 과제였다. 재로 새끼를 꼬라는 것이었다. 조정은 다시 깊은 걱정에 휩싸였다. 오랜 논란 끝에 연거푸 답을 맞힌 그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들이 노모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어머니, 재를 가지고 새끼를 꼴 수 있나요?” 노모가 대답했다. “그럼 할 수 있지. 새끼를 꼬아 거기에 기름을 부어라. 그리고 불을 질러라. 그러면 될 것이다.” 세 번째 문제까지 맞히자 임금이 아들을 불러 물었다. “너는 어찌 이런 놀라운 지혜를 지니고 있는가?” 아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제가 임금님을 속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푼 것이 아니옵니다.”
“그건 또 무슨 얘기냐? 네가 풀지를 않았다니?” 의아한 표정으로 임금이 물었다. “문제를 푼 사람은 저의 노모입니다. 노인을 버리라는 법을 어기고 몰래 모신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소서.” 그러자 임금이 탄식을 하면서 말을 받았다. “어허, 그것이 다 노인에게서 나온 지혜였다는 말인가? 여봐라. 오늘부터 당장 노인들을 버리는 법을 없애도록 하라.”
노인들의 지혜가 빛을 발휘하던 시절이 있었다. 농경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고 산업시대에 들어서도 한동안 장로의 시절이 이어졌다. 앨빈 토플러의 표현을 빌자면 '제3의 물결'이 밀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노인이 세상을 뜨면 서재 하나가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아는 것이 많은 존재가 노인이었다. 때문에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었고 경로의식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로 디자이너인 노라노의 인터뷰 기사를 보던 중 한 대목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야망과 도전은 달라요. 나는 도전하는 사람이지 야심은 없어요.” 올해 84세가 되었다는 그 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노인이 되어도 공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받게 되는 법이다. 젊은이들의 경로의식이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꼭 젊은이들만의 문제라고 하기도 또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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