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병조 금강대 총장 |
부처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기는 어렵다. 근본불교의 교설은 대체로 소박하고 진실하다. 삶은 고통이라는 것, 그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서라기보다 내부적인 요인이 많다는 점, 그래서 그 내면의 완성을 이룩해야 한다는 점 등이 골자다. 그러나 부파불교에 이르면 불교의 사상은 매우 현학적이고 관념적으로 변질된다. 사물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인간 내면 또한 철저히 해부한다.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다보니 다분히 신비적인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철학교수들끼리의 농담 한 토막. 철학이란 무엇인가?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는 것'. 그래서 서서히 불교는 철학적 색채를 띠게 된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말하면 그 분의 삶은 '자비의 여로'였다. 그는 철저히 이타(利他)의 발자취로 일관하였다. 대부분의 우리네 인생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헌신이다. 혹은 위인이라고 부르는 분들은 그 헌신을 조국과 인류에게로까지 확산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자비를 중생, 즉 모든 생명 있는 존재로까지 확대한 분이다. 그와 같은 삶이 가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로움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불교를 좋아한다거나, 믿는다는 뜻은 그 분처럼 살려고 하는 서원이라고 생각한다.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기 때문에 존중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처님답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 삶이 예찬 받는 것이다.
금년 초파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대선을 앞둔 정국은 어수선하고, 경제적 난맥, 국론분열 등 적이 염려 된다. 원래 어지러운 것이 사바세계이지만, 갈수록 그 농도가 짙어가는 듯하여 안타깝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 부처님처럼 되는 일이 오늘처럼 힘든 적은 없는 듯 싶다. 그래서 대두되는 문제가 생활불교, 응용불교다. 생활불교란 우리의 삶 속에 불교적 가치관이 투여되도록 노력하자는 뜻이다. 입으로 외우는 불교, 마음먹는 불교, 실천하는 불교가 각각 달라서는 안 되겠다는 뜻이다. 응용불교란 오늘의 산적한 문제들을 불교적으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은 다변화에 있다.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매도하는 흑백논리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과거의 대결구도는 명백히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인 축(軸)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선과 선의 대결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더 선한가를 따지는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불교적 중도가 초월적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금세기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대결에 의한 승리라기보다는 양자를 초월하는 원융조화에 있다. 그 화합의 힘은 어디에서 솟는가. 바로 내면의 완성, 그윽한 힘이 외부로 스며 나오는 것을 말한다. 결국 부처님이 외친 인간성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 불자들의 서원이어야 한다. '중생이 곧 부처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우리가 가야할 목표를 수평적으로 보아야한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행복이 결코 외부의 '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 수행이라는 것 등을 토로하고 있다고 본다. 그 내면의 완성이 사바세계로 펼쳐지는 것을 불국정토라고 말한다.
어느새 천지가 봄빛으로 가득하다. 물오른 연둣빛 새순이 나목(木)에 드리운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가 싶더니 라일락과 영산홍의 화사한 모습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제 대지는 또 약동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고 있다. 생명의 근원은 물과 빛이다. 비록 중생이 원치 않더라도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빛은 음습한 골짜기까지 미친다. 부처님의 고마움을 모르는 중생들에게까지 그 아늑한 자비원력은 어김없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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