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윤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장 |
중산층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다. 연봉정보 사이트 페이오픈은 '대한민국 중산층의 연봉은 5000만 원'이라고 했다. 어느 일간지는 한국의 중산층 조건을 “4년제 대학을 나오고, 10여 년 정도 한 직장에 다니고, 월 소득은 400만 원 이상이고, 30평 이상 아파트에 살며, 2000cc 이상의 중형차를 타는 사람”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중산층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생존행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다른 계층과 차별되게, 삶의 가치를 높이고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다”라고 했다.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은 “중산층은 외국어 하나쯤은 자유롭게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추고,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접대를 할 줄 알고,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설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중산층 기준이 '얼마를 벌어야 한다'라면, 서구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기준이 되고 있다. 사회학자의 “단기간 내에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는 소득규모나 구체적인 데이터에 의거한 삶의 수준을 구분하고, 삶의 질이 높은 국가에서는 삶의 무형적인 가치로 사회적 계층을 나눈다”는 학설과 일치하고 있다.
삶의 품질은 자신을 위해 건강, 문화, 취미를 즐기고, 가정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회의 정의를 먼저 생각할 때 높아진다. 이것이 곧 중산층의 가치여야 한다. 이제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인 우리도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떤 지향점을 향해 어떻게 삶을 즐기고, 누리고, 베풀며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특히 시민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꿔주는 적극적 기부참여 여부가 중산층의 기준에 들어가야 한다.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가정을 소홀히 하진 않을 것이고, 사회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웃을 모른 체 할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기부금 규모가 매년 커지고 있다고 하지만 소득 규모 대비 미국의 절반에 못 미치고 있다. 그나마 개인의 경우 종교단체 헌금이 80%가 넘어 미국의 약 33%와는 크게 차이난다. 실질적인 자선적 기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기부 하면 '시장 할머니의 미담'으로 생각하는 게 우리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물론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의한 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 oblige)' 즉,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다. 그러나 역시 기부문화의 중심은 사회의 허리인 중산층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이 정부를 맡고, 다른 두 계층(부유층과 빈곤층)을 수적으로 압도하는 정치체제가 최선이라고 봤고,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인 랜드는 “상류층이 한나라의 과거라면, 중산층은 그 나라의 미래”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전의 미래는 어느 도시보다 밝다. 근로소득 대비 기부금 비율이 1.72%로 전국에서 최고 높은 도시다. 전국 평균이 1.33%이고, 서울이 1.22%인 것을 보면 대전시민의 따스한 마음은 월등하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도 지난주에 사회공헌단 발대식이 있었다. 이웃과의 나눔과 베풂의 활동이 그동안 개별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전략적이고 시스템화 할 것으로 기대하는 바가 크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 깊이 가려면 굽이 돌아가라 /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케냐 마사이족의 속담처럼 함께 사는 지혜가 쥐어 짜인 중산층이 아닌 새로운 문화 리더로서의 중산층이 가져야 할 삶의 품격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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