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인석·수필가 |
사람이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는 것도 바로 염치나 수치를 아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세태는 염치의식도, 수치의식도 없어지고 있다. 미국의 어느 시인은 “나는 차라리 돌고 돌아 개와 같이 살았으면…/ 그들은 삶에 땀도 흘리지 않고 불평도 않는다./ 어두운 밤에 죄 때문에 우는 일도 없을지니…”라고 읊었다. 고된 일도 없고 불평도 없고, 따라서 죄책감도 없고, 부끄러움도 있을 수 없는 개의 삶을 부러워했던 이 시인의 노래는 인간의 윤리적 가치와 양심을 확인하는 역설적 찬미다.
부끄러움이란 인간에게 자아확립의 계기이며 인격수양의 동력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곧 염치고 양심이다. 누구나 인격을 논할 때는 반드시 양심과 염치가 기준이 된다. 염치의 영역은 넓다. 수줍음, 쑥스러움, 창피, 치욕, 불명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누구나 부끄러움을 깨달을 때는 얼굴색부터 붉어진다.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깨닫기 시작한 양심과 염치의 순수한 표현이다.
부끄러움에는 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도 있다. 자의적 비굴과 타의적 굴종, 또는 군림과 추종도 포함된다. 돈과 권력만 바라고 사는 탐욕의 인간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 치욕이고 부끄러움이다. 치욕에 대한 저항은 염치 수호다. 염치야말로 인간고유의 도덕과 윤리의식이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면, 가히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만하다”는 맹자(孟子)의 교훈처럼, '염치'는 깨끗하고 조촐한 부끄러움을 뜻한다. 또 공자(孔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라”고 훈계했다. 수 많은 명언절구가 아니더라도 동ㆍ서양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은 염치가 무엇이며, 이 사회에서 왜 염치가 필요한 것인지를 명료하게 가르치고 있다.
거칠었던 총선(總選)의 바람은 이미 끝났지만 부끄럼 모르는 파렴치한들이 아직도 곳곳에서 판치고 있다. 부끄러운 사실이 들통 나자 자살을 택한 어느 대통령은 그래도 염치를 아는 편이었다. 뇌물 먹고도 무죄 억지 쓰는 뻔뻔스런 어느 전직 여자재상(女子宰相)의 몰염치…. 그래도 자기만이 '양심'이고, 자기만이 '이브'라고 떠들어대며, 국민들을 향해 “나를 따르라”고 소리쳐대는 모습은 가히 파렴치한 급이었다. 도덕과 윤리는 기(氣)가 죽어 졸부들만의 가슴에서 콩닥대고 있을 뿐이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자아의 정립과 통제'를 추구하기위한 자기처벌의 표현이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부정비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시대 어느 누가 자기를 처벌할 것인가. 자기처벌의 기초가 되는 '자아정립과 통제'는 교육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부끄러움을 교육하는 곳이 없다. 학교도 사회도 나라도 시대도 부끄러움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정치와 통치, 그리고 교육이 오히려 부끄러움의 정서를 요절내고 있다.
교단의 바른 교육풍토를 망친 것도, 참교육을 빙자한 위선교육자들을 용인한 것도 바로 통치권력 때문이다. 좌파정권 10년, 통치가 조장하고, 정치가 방관하는 동안 국가관ㆍ역사관 등 모든 가치관 교육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염치도 수치도, 윤리도덕의 가치관도 모두 무너졌다. 다가오는 대선정국을 앞두고 또 다시 회오리칠 좌우 이념대결도 잘못된 정치, 통치가 근본 원인이다.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무리들은 따로 있다. 이 시대의 부끄러움을 누가 가르칠 것인가. 가치관 교육정책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